사회 > 사회일반

[박대종 문화소통]세종대왕의 법 탓에 노비가 대폭 증가했다는 거짓말

등록 2019-07-30 06:02:00   최종수정 2019-08-05 09:27:15
  • 크게
  • 작게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이메일
  • 프린트
박대종의 ‘문화소통’
associate_pic
<사진> 훈민정음에선 ‘ㅉ’은 긴소리, ‘ㅈ’은 짧은 소리. 동국정운은 노비를 뜻하는 ‘종(從)’이 장음이고 쇠북 ‘종(鐘)’이 단음인 이유를 보여준다.

【서울=뉴시스】 1930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문철자법’ 공표 시, 우리말의 된소리 표기는 된ㅅ이 폐기되고 ㄲㄸㅃㅉㅆ으로 왜곡됐다. 그 결과, 훈민정음 체계와 달리 우리말 긴소리는 글자로써 단음과 구별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다.

일례로, 땡땡땡 울리는 ‘종(鐘)’은 단음이고, 노비의 동의어인 ‘종’은 장음이다. 그 둘의 장단음 구별 문제는 ‘종(從)’을 <사진>에서처럼 우리말 바른 한자음의 지침서인 ‘동국정운’에 기재된 ‘쭁(從)’으로 표기하면 해결될 것이다. 우리 발음은 지금도 상당수 동국정운의 발음을 유지하고 있다.
  
‘노비’라는 말은 ‘奴(사내종 노)’와 ‘婢(계집종 비)’의 합성어이며, 긴소리 ‘종(從)’은 노비를 총칭하는 말이다. 從의 본자는 ‘从’으로 앞사람(人)을 뒤따르는 사람(人)의 모습에서 ‘따르다, 따르는 사람 → 수행원, 주인을 따라다니며 시중드는 사람’ 등을 뜻한다. ‘시중’의 어원은 ‘侍從(시종)’이며, ‘서경’ 경명(冏命) 편의 “옛날 문왕과 무왕을 시중드는 복종(僕從)들이 올바른 이가 아닌 사람이 없었다.”란 구절에 ‘종’이 보인다.

도가 높아지면 그에 따른 마도 성해진다고, 근래 들어 세종대왕을 폄훼하는 기운들이 여기저기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각종 폄훼 중에서 노비와 관련된 사항들은 악성이다. 조선은 엄격한 신분제를 유지해야 기강이 서는 왕조국가였고, 세종은 천인이라도 장영실 같은 인재라면 차별 없이 등용함은 물론 노비에게도 출산휴가를 준 성군이었다.

그럼에도 노비제도와 관련하여 대표적 폄훼 사항은, ①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박탈한 노비고소금지법을 세종이 만들었다와, ②세종은 여자종이 양인 남자와 결혼하여 낳은 자식들의 신분을 노비로 하는 종모종천법(從母從賤法)을 제정하여, 그 결과 노비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이다.

①번 사항은 세종 2년(1420) 음력 9월 13일자와 1422년 2월 3일자 실록을 살펴보면 사실관계를 알 수 있다. 세종 즉위 초반부터 1422년까지 4년간 아버지 태종이 태상왕의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며 국정을 주관했다. 1420년 허조가 위계질서를 세우기 위해 당태종의 발언을 근거로 들며, 종으로서 주인을 고발하는 자가 있거든 접수치 말고 참수할 것을 읍소하자 태종이 감동하여 수락한다. 그러니 1422년 2월 3일 형조의 재차 건의에 따라 비록 참형이 교형(絞刑)으로 낮춰졌다 하더라도, 노비고소금지법을 제정한 이는 태종이다.

이와 같은 법이 제정됐지만 세종 때는 경우에 따라 노비가 주인을 고발하는 일이 가능했다. 1437년 음력 11월 4일, 주인에게 억울하게 맞아 죽은 노비 서가이의 어미 부가이가 여종의 신분으로 주인을 고발했다. 이 사건에 대해 세종은 좌찬성 신개의 의견을 받아들여 주인 이씨를 국문토록 했고, 부가이는 교형을 받지 않고 속죄토록 하여 억울함을 풀어줬다.
  
②번과 관련하여선, 세종은 태종이 1414년 제정한 종부법(從父法)의 폐단, 즉 양인이 되기 위해 천민인 본남편을 부인하고 다른 양인 남자를 자식의 아비라 하고, 또 그 자식은 양인이 되고자 친부인 천민 아비를 부정하여 천륜을 파괴하는 큰 폐단을 바로잡고자 했다.

고심 끝에 세종은 1432년 3월 25일 양민과 천민이 서로 관계하는 것을 일절 금지시키되, 범법할 경우 그 소생들은 사노비로 만들도록 조치했다. 이는 고조선의 8조법금 중, 도둑질 한 자는 노비로 삼되, 속죄를 위해서는 50만 전을 내게 하여, 결과적으로 이 땅에 도둑을 줄인 것과 같은 경우이다. 8조법금처럼 세종의 조치는 노비증가가 목적이 아니었다.

1439년 윤 2월 13일엔 성달생·조비형·이중지 등이 외방에 나가 있을 때 관기들로부터 낳은 자식들을 속량해주었으니 세종은 부왕의 종부법을 폐하지 않고 절충했다. 고로 세종의 법으로 인해 노비가 대폭 증가했다는 말은 허위이다. 진실은, 1468년 6월 14일 세조가 송희헌의 상소에 따라 고려 때 종모법을 다시 세운 이후 노비 인구가 증가하게 된 것이다.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heobulan@naver.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이메일
  • 프린트
텝진으로 위클리 기사를 읽어보세요
위클리뉴시스 정기구독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