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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립 잡기노트]애국가는 윤치호 작사, 최고증거 첫 발굴

등록 2014-12-03 08:03:00   최종수정 2016-12-28 13:4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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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100년 전 ‘태평양 잡지’는 ‘애국가와 찬미가’라는 글에서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말했다.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480>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1865~1945)라는 사실을 밝힌 가장 오래된 사료가 발굴됐다. 이승만(1875~1965)이 1913년 9월 하와이에서 창간한 한글월간 ‘태평양 잡지’ 1914년 4월호의 ‘애국가와 찬미가’다.

 1908년 윤치호 역술 ‘찬미가’를 언급한 최초의 보도다. “무궁화 곡조에 다른 말로 만든 것”이 애국가라고 썼다. 윤치호가 무궁화가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증언이다.

 또 “찬미가는 본국에서 압수하고 매매를 금지한 책인데 한 권을 우리가 얻었기로 대강 뽑아서 등재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차차 노래를 애국제도로 모본하여서”라며 일제가 조선에서 찬미가를 압수하고, 애국가를 금지했음을 전했다.

 당시 윤치호는 ‘105인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 투옥(1913~1915)돼 있었다. 판금 당한 윤치호 저작 찬미가를 교민단체가 구해 기사화한 것이다. 국내에서는 공개할 수 없던 내용이다. 조선총독부가 찬미가를 불온서적으로 낙인하자 소유자들이 스스로 폐기, 희귀해졌다는 사정도 드러났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애국가작사자 조사위원회가 애타게 찾던 바로 그 책이다. 조사 기간인 4월27일과 5월2일, “윤치호 저 찬미가 가지신 분 알려주길 요망”이라는 신문고지로 공개수배했으나 끝내 손에 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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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애국가 작사자 윤치호. 청년-중년-노년기
 찬미가 제1장에는 국가(KOREA/ AMERICA), 10장에는 무궁화가(Patriotic Hymn/ Auld Lang Syne), 14장에는 애국가(Patriotic Hymn/ Auld Lang Syne)와 서양 찬송가 12곡이 수록됐다.

 ‘태평양 잡지’의 ‘애국가와 찬미가’는 찬미가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무궁화가와 애국가 간 관계뿐 아니라 두 노래의 성격, 애국가의 중요성, 그리고 번역 수준도 평가했다.

 “년 전에 윤치호씨가 찬미가라는 책 한 권을 발간하였는데 장 수는 많지 않이하나 금옥같은 것이 그 속에 있는지라 그것은 ‘국가와 찬송시’로 정신과 기운이 능히 사람의 마음을 더욱 흥기시키는 윤치호의 애국심과 종교심의 고창함을 가히 보겟도다.”

 미국 교민에게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곡조가 서양 것이어서 모두 ‘번역’이라고 표현한 탓이다. 1장 ‘KOREA’의 곡조가 미국 국가 ‘AMERICA’임을 들며 “1장은 미국 국가 곡조로 번역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10장은 무궁화가이니 이것도 본래 서양 애국가라 이는 우리가 다 항상 부르며 윤씨의 번역으로 아는 바이오”라고도 했다. 서양 곡조에 맞춘 것을 번역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애국가에 대해서는 “다른 말로 만든 것”이라고 명기, 작사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12편의 찬송가 번역과 관련해서는 2장을 “국내 ‘통일찬송가’ 146편이니 번역을 기존 찬송가보다 낫게 만든 것”, 9장은 ‘통일찬송가’ 124편인데 “대단히 잘된 번역”이라면서 원래 번역보다 힘차게 했다고 추어올렸다. 마지막 15장은 “한미 찬송가에 빠진 것”이라고 정확히 파악해 새로 부르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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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김연갑. 애국가와 아리랑 연구의 권위자다.
 윤치호는 일본에서 영어를 익히고 돌아와 조정에서 통역관으로 일했다. 이후 중국과 미국에서 종교학과 영문학을 전공했고, 중국 중서서원에서 영어 교수를 했다. 귀국해서는 최초의 영문법서 ‘영어문법첩경’을 펴낸 당대 영어의 고수이므로 위 칭찬은 타당하다.

 기사는 노래로서의 애국가 기능도 강조했다. “청년 지사의 애국심을 고동하며 의기 남자의 용진심을 충격하는 활발 정진할 기상이 적은지라 없어진 것을 슬퍼하고 노예된 것을 원통히 여길진대 정신을 가다듬고 용기를 내여 일어나 앞으로 나갈 길을 찾을지언정 다만 앉아서 슬피 울며 원망이나 하고야 무슨 힘이 있으리오. 우리 애국가의 사상이 크게 변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어 “파란국(폴란드)이 조만간 독립을 하기는 세상 사람이 다 바라며 믿는 바라. 애국가를 보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말이라 한인의 처지에 있는 자 보고 감동할 만한 노래”라며 애국가 1~4절 가사를 알렸다.

 이 자료를 찾아낸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서지학자)는 “59년 전 애국가작사자 조사위원회는 1945년 9월 윤치호가 자필로 남긴 ‘1907년 작’ 애국가 가사지와 1910년 신한민보의 ‘윤치호 작사 국민가’(애국가와 동일 가사)를 증거로 인정했지만, 이 찬미가를 입수하지 못했다. 그때 이 1914년 기록이라도 물색했다면 왜 실물을 구할 수 없는지를 알았을 것이고, 애국가 작사자를 ‘미해결’이라고 결론 내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아울러 “이 잡지의 다른 쪽에서는 일본 크로니클 신문을 인용, 윤치호가 옥사했다는 풍문을 전하고 있다”면서 “이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윤치호와 애국가에 주목한 기사인데, 찬미가와 애국가의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것을 당연시한 중요한 자료”라고 평했다.

 온라인편집부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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