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 사회일반

[신동립 잡기노트]이순신 장군님, 알고보니 미남 아니시네요

등록 2015-01-22 13:40:40   최종수정 2016-12-28 14:28:20
  • 크게
  • 작게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이메일
  • 프린트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491>

 낯선 이순신(1545~1598) 장군이 발견됐다. 단기 4282년(1949) 10월20일 서울 화신백화점 서적부가 발행한 ‘5000년간 창업제왕·위인·의사·선현 존영(五天年間 創業帝王 偉人 義士 先賢 尊影)’ 72인 속 얼굴이다.

 이들 역사인물 71인은 대부분 낯익다. 여기저기서 접한 모습 그대로다. 이순신만 딴판이다. 1953년 장우성(1912~2005)이 그리고, 1973년 이충무공 영정심의위원회가 표준영정으로 지정한 ‘미남 이순신’과 다르다. 당시 위원회는 “이순신의 본래 초상화가 없었기 때문에 옛 문헌의 고증에 의해 그린 것”이라며 “많은 학자들의 고증이 있었으며 이순신과 관련된 여러 문헌자료가 활용됐다”고 백그라운드 브리핑을 했다.

 하지만 ‘본래 초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통영 착량묘, 순천 신성리 신당, 한산도 제승당, 여수 충민사와 장군 영당(해신당), 아산 현충사 등이 이순신 영정을 모셨다. 알려지지 않은 곳은 훨씬 더 많았을 터이다.

 이순신 사당인 착량묘의 영정과 관련, 이은상(1903~1982)은 “왜적이 물러간 뒤에 해상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공의 충절에 감격해 초가를 짓고 공의 초상을 모시고 제사 지냈다”고 전했다. 신성리 신당(현 충무사)의 초상화는 1944년 일본인의 방화로 재가 돼버렸다. 1606년부터 제승당에 있었다는 영정은 1920년대에 멸실됐다. 현충사에 전래된 초상도 일제강점기에 없어지고 말았다. 충민사 영정은 이순신의 신관을 정확하게 담아냈을 개연성이 짙다. 이순신을 도와 참전한 승려 옥형이 기거한 절이기 때문이다.

associate_pic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그림은 갔어도 글은 남았다. 이순신의 이목구비를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이다.

 1594년 한산도에서 이순신을 만난 고상안(1553~1623)은 “얼굴이 풍만하지도 풍후(豊厚)하지도 못하고 상(相)도 입술이 뒤집혀서 마음 속으로 여기기를 ‘복장(福將)은 아니구나’”라고 묘사했다. 윤휴(1617∼1680)는 “나의 선인이 공의 딸을 외부(外婦)로 삼았으므로 나는 그나마 공의 집사, 하인 및 공을 섬긴 사람들을 만나서 공의 용모와 기호와 모습이 어떠한 사람이었나를 물어 알 수 있었다. 공은 큰 체구에 용맹이 뛰어나고 붉은 수염에 담기(膽氣)가 있는 사람이었다”고 옮겼다. 홍우원(1605~1687)은 “팔척 장신에 팔도 길어 힘도 세고 제비 턱, 용의 수염, 범의 눈썹에 제후의 상”이라고 읽었다.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고 얼굴은 단아해 마치 수양하며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다”고 류성룡(1542~1607)이 ‘징비록’에 달리 말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는 무인 위에 문인이 있던 당대에 신(神)급 전쟁영웅을 예우한 관용구 쯤으로 이해된다. 류성룡이 표현한 의병장 김덕령(1567~1596)의 안면이 이순신의 생김새와 거의 똑같다는 점이 근거다.

 1930년대 초까지 존재한 각 지방의 이순신상을 살핀 이상범(1897~1972)과 최우석(1899~1965)은 이순신을 무골로 그렸다. 부산 소재 ‘전(傳) 이순신 초상’의 오른쪽 위에는 ‘충무공이순신상’이라는 화제가 적혀 있다. 아니나 다를까, 파워풀한 무인의 형모다. 1947년 8월 과도정부 우표의 이순신 존안 또한 마찬가지다.  

associate_pic
 ‘오천년간 창업제왕 위인 의사 선현 존영’을 발굴한 차길진 회장(68·후암미래연구소)은 “이 그림표 속 충무공은 표준영정의 문신풍 이순신과 차이가 크다. 이상범 화백이나 최우석 화백의 이순신 초상도 배제한 독자적인 충무공 초상화다. 1943년 여수경찰서 형사부장 김차봉이 가져갔다는 장군 영당의 영정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나머지 71현 초상화들이 공신력을 갖췄다는 사실로 미뤄볼 때 장군 영당의 영정을 참조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차 회장은 ‘영능력자’로 통한다. 이번 72존영도 그가 찾은 게 아니라, 당신들이 차 회장을 불렀다는 것이 주변의 귀띔이다. 앞서 차 회장은 사형장의 윤봉길 의사 사진, 신윤복의 ‘맹획 고사도’, 영친왕 유물, 대한제국황실 사진 등을 일본에서 환수했다. 그때마다 이 유물들이 차 회장에게 먼저 손짓을 했다는 설이 파다했었다.

 편집부장 [email protected]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이메일
  • 프린트
  • 리플
위클리뉴시스 정기구독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