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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갉아먹는 열정페이]① 돈은 기대말고 열정만으로 살아라

등록 2015-02-11 08:30:00   최종수정 2016-12-28 14:3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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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일은 시켜줄 테니 돈은 기대하지 마라. 대중문화·예술계에 만연한 ‘열정 페이’는 이렇게 시작된다. 연기자나 예술가, 감독 스태프가 되기 위해, 또 언젠가는 자기 분야의 최고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사는 젊은이들은 첫걸음을 떼자마자 혹독한 현실 앞에 좌절한다. 최저 시급에도 못 미치는 보수를 감내하면서 비인간적인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대우가 열정에 반비례하는 역설’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젊은이들의 꿈을 갉아먹는 열정 페이의 실상과 해결방안을 네 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서울=뉴시스】유상우 오제일 기자 = “메인 작가들이 두렵다.”

 한 TV 예능 프로그램 작가 경력 1년 차 A(21)의 첫 마디엔 냉소와 좌절감이 배어 있었다. “메인 작가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잘못 건드렸다간 일을 그만둬야 한다. 커피 심부름, 복사, 청소는 예사고 세탁소 심부름까지 해야 한다”며 “작가들의 세계는 철저한 상명하복식 군사문화가 지배한다”고 털어놨다. “메인 작가에게 말대꾸하는 건 꿈도 못 꾼다. 전화도 바로 안 받으면 불호령이 떨어진다. 이 바닥이 좁다 보니 소문이라도 잘못 나면 다른 곳에서도 일감이 끊길까 봐 더러워도 참고 견딘다”고도 했다.

 예능프로그램 막내 작가들의 삶은 고되다. 급여는 100만 원 내외, 이마저도 못 받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근무시간은 들쭉날쭉하고 야근 수당은 딴 세상 이야기다. 게다가 파리 목숨이다. 메인 작가들이 이들을 쓸지 안 쓸지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셈이어서 ‘영혼 없는 예스맨’ 역할에 길들지 않으면 안된다.

 언젠가는 메인 작가가 되겠다는 열정이 있어서 자리만 안정적으로 보장된다면 보수가 적어도 버틸 수 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이들의 성공에 대한 열정은 ‘희망 고문’에 가깝다. 이들은 메인 작가의 어깨너머로 눈치껏 배워야 한다. 우연히 PD의 눈에 띄어 발탁되지 않는 한 지금 자리를 지키기도 버겁다.

 막내 작가들은 프로그램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출연자들을 섭외하는 게 주요 일과다. 하지만 본업보다 선배 작가들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허덕인다.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생명’은 보장받지 못한다. 자료수집 등이 완료돼 프로그램에서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게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이 끝나면 곧바로 잘리기도 한다. 이런 허드렛일 외에 중요한 작업에 끼워주거나 교육하는 과정은 드물다.

 경력 6개월에 접어든 다른 방송 작가 B(20)는 “악덕프로덕션 같은 경우는 한 달 급여가 50여 만 원에 불과하다. 일이 밤늦게 끝날 경우 택시비가 없어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거나 새우잠을 잔다. 밥값을 아끼려고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울 때가 많고 상황이 더 안 좋을 때는 한 두 끼는 굶기도 한다”고 고백했다.

 지방 출신 작가들은 서울의 값비싼 월세를 감당 못 하고 부모에게 지원을 받아 버티기도 한다. 월세가 가파르게 오르면서 서울 외곽이나 수도권 원룸으로 밀려난 이들이 부지기수다. 또 불규칙한 식사와 운동량 부족으로 비만과 변비를 달고 산다.

 다른 방송작가 C(25)는 “외주제작사에 몸담고 프로젝트를 진행한 석 달간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고 말했다.

 C는 외주제작사에서 일하면 ‘입봉’(작가가 프로그램을 맡는 일을 지칭하는 속어)이 빠를 것이라는 말에 매달 80만 원을 받고 견디다가 몸이 축난 사례다. 출근 시간은 오전 9시로 고정돼 있었지만, 오후 9시 퇴근 시간은 무의미했다.

 1주일에 평균 하루는 꼬박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이튿날에도 일했다. 하루 6시간 남짓한 취침 시간도 2시간 단위로 쪼개 잠을 자야 했다. 밤사이 새롭게 올라오는 프로그램 관련 기사나 실시간 검색어를 훑어 봐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템을 선점해야 살아남는 시스템이었다.

 C는 “방송작가 같은 경우 구조적으로 불만이 적다. 문제를 제기하면 ‘너도 이것만 견디면 메인 작가가 돼 혜택을 누린다’는 말이 돌아온다. 끈기있게 기다려보자며 그냥 넘어갈 때가 많다. 방송작가들이 생각은 개방적인데 조직 사회 안에서는 보수적인 경향이 많다”고 돌아봤다. 박 씨는 최근 ‘입봉’ 꿈을 접었다.

 2013년 5월 기준 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은 2700여 명이다. 하지만 방송작가협회에는 일정한 경력을 갖춘 작가만 회원이 될 수 있어 비회원 방송작가를 포함하면 1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부 드라마작가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공개모집보다는 인맥을 통해 제작에 투입된다. 프로그램 단위 팀별로 책정된 제작비 총액 내에서 PD의 재량에 따라 사람을 찾아 쓰는 형식이어서 회사와 근로계약이나 집필계약 없이 그냥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허술한 고용 시스템 때문에 작가들은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방송작가의 원고료는 대부분 방송이 나간 이후 주는 후지급제다. 방송이 취소되거나 제작 도중 불방 결정이 나면 원고료를 떼이거나 일부만 받기도 한다. 문서로 된 근로계약서 없이 구두계약이다 보니 저작권료를 법적으로 보장받기도 막막하다. 방송사 프로그램 개편 때마다 잠을 설치며 불안에 떤다. 프로그램의 규모 축소나 폐지로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는 경우가 종종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나마 한국방송작가협회에 소속된 작가들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지만 이런 울타리 바깥에서 떠도는 무명작가들을 보호해 줄 사회적 안전망은 어디에도 없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내용과 관계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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