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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갉아먹는 열정페이]② 3개월 찍던 영화 엎어지니 스태프는 빈손

등록 2015-02-11 08:30:00   최종수정 2016-12-28 14:3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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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현장서 15시간 일하고 월 60만원  영화 막내 스태프 평균연봉은 566만원  팀장에 보수 일괄지급 ‘알아서 나눠라’

【서울=뉴시스】손정빈 기자 = 지난해까지 8년간 영화판에서 조명 관련 일을 해온 A(30)는 올해 초 일을 그만뒀다. 생계유지가 불가능해서다. 그는 “8년간 번 돈이 8000만원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한 달 평균 80만원 정도 번 셈이다. 그는 지금 편의점과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은 월 180만원이다.

 영화를 좋아했던 A는 2006년 대학을 중퇴하고 영화판에 뛰어들었다. 어디서든 열심히만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열정’이 있었다. 막내로 일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다 그렇게 배우는 거야’다. 한때는 A도 그렇게 생각했다. 막내 시절 그의 한 달 수입은 50만원 남짓, 집안 사정이 어렵지 않아 부모에게 용돈을 타 쓰며 버텼다.

 A가 일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한 건 지난해 초다. 지난해 하반기 개봉한 블록버스터급 영화에 참여한 그는 6개월간  일하면서 한 달에 60만원 정도를 손에 쥐었다. 영화 촬영 기간 내내 A는 매일 15시간 이상을 현장에 있었다. 밤 촬영은 물론 밤을 새우는 날도 많았다. 그 현장에는 자신보다 적은 돈을 받은 후배들도 수두룩했다.

 “퍼스트가 알아서 돈을 나눠주는 시스템이죠.” 영화는 촬영팀, 의상팀, 조명팀 등 분야별로 나뉘어 있다. 조명팀인 A는 조명감독에게 돈을 받는다. 조명감독이 퍼스트다. 팀장 개념이다. 팀장은 밑의 세컨드, 서드, 막내로 팀을 만들어 영화에 참여한다. 제작사는 퍼스트에게 임금을 일괄 지급한다. 돈을 받은 팀장이 ‘알아서’ 돈을 나눠준다. 팀장에게 항의했다가는 더는 일을 하지 못한다. 이른바 ‘도제식 시스템’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팀장은 A에게 “일이 우선이고 돈은 그다음”이라고 말했다.

 현재 연출부 ‘서드’로 일하는 B(27)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그에게 ‘국제시장’을 계기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는 표준근로계약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그런 영화가 몇이나 되겠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군대랑 비슷하죠. 줄을 잘 서야 돼요. 윗사람이 돈을 안 주면 못 받으니까요. 근데 그게 자기 맘대로 되나요. 그냥 참고 사는 거죠.”

 그는 지난해 3개월 동안 촬영하던 영화가 투자 문제로 엎어지면서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제작사에 항의해봤지만, 오히려 핀잔만 들었다. 그때 그가 주변에서 들은 말도 A가 들었던 말과 똑같다. “이러면서 배우는 거야.” 그는 표준근로계약서라는 말을 ‘국제시장’을 통해 처음 알았다고 한다. B는 아르바이트하면서 계속 일을 할 거라고 했다.

 촬영일을 하는 C(32)는 한 영화가 TV에 나올 때마다 울화통이 치민다. 몇 해 전 개봉한 이 영화는 크랭크인에서 크랭크업까지 1년이 걸렸다. 외국 촬영만 5개월 가까이했다. 주요 스태프는 임금을 받았지만, 하위 직급 스태프는 외국촬영 기간 임금을 받지 못했다. 그는 “지금도 이런 사례가 허다하게 일어나고 있다”며 “일이 힘든 건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일한 만큼만 돈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아직 갈 길 먼 영화노동환경

 지난달 30일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이 내놓은 ‘2014년도 영화스태프 근로환경실태조사’를 보면, 영화 스태프의 연평균 소득은 1445만원이다. 서드 스태프는 연 854만원, 막내 스태프는 평균 연봉이 566만원에 불과하다. 지난해 영화 스태프의 일주일 평균 노동시간은 71.8시간이었다.

 처음으로 표준근로계약서를 도입해 큰 성공을 거둔 ‘국제시장’의 사례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지난달 27일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표준근로계약서를 채택한 영화 ‘시간이탈자’ 촬영 현장을 방문해 영화시장 정상화를 언급했다. 그러나 영화 스태프의 처우를 개선하고 노동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다.

 영화계에 표준근로계약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건 2013년이다. 그해 제2차 영화노사정협약 체결이 이뤄지면서 몇몇 영화 제작사와 대기업 투자사가 ▲최저임금보장 ▲근로시간 준수 ▲근로환경개선 ▲시간 외 근로수당 지급 ▲4대 사회보험 가입 등의 내용을 담은 근로기준법에 따른 표준근로계약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영화진흥위원회는 현재 이런 내용을 ‘권고’하고 있다.

 지난해 표준근로계약서 사용률은 23%. 2013년 5.1%와 비교하면 크게 올랐지만, 웬만한 시간제 아르바이트직도 근로기준법을 철저히 준수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낮은 수치다.

 ◇도제식 인력 활용 방식의 폐해…제작사는 나 몰라라

 A의 사례에서 보듯이 영화계에는 도제식 훈련 과정이 존재한다. 총연출을 담당하는 감독, 촬영감독, 조명감독, 의상감독, 분장감독 등 각 감독이 자신이 맡아 키우는 스태프를 데리고 있는 식이다. 이들은 경력에 따라 세컨드, 서드, 막내로 분류된다. 이들은 자신의 바로 윗사람에게서 일을 하나씩 배워가며 한 계단씩 지위가 올라간다.

 제작사는 스태프를 감독에게 추천받거나 직접 섭외해 팀별로 따로 계약한다. 다시 말해, 팀장들과 계약하는 것이다. 팀장이 어떤 영화사와 예약을 하면 그 팀원들은 자연스럽게 그 영화 현장에 참여한다. 팀장은 자신의 임금과 자기가 ‘데리고 있는’ 스태프의 임금을 받는다. 팀장은 이 돈을 임의로 각 세컨드와 서드에게 나눈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이를 두고 “유일하게 한국에만 있는 관행”이라고 했다. 이런 구조는 각 팀장을 ‘갑’으로, 팀장에게 일을 배우는 스태프를 ‘을’로 만든다. 보수가 적어도, 일이 힘들어도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영화 일을 시작한 지 1년이 됐다는 막내 스태프 D(22)는 “돈은 그냥 주는 대로 받는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하위 직급 스태프들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불만을 말할 수 없다. 항명했다가는 상위 스태프나 제작사에 찍혀 더는 일을 할 수 없다. 제작사는 이미 모든 계약을 마쳤다는 이유로 돈이 어떤 스태프에게 어떻게 배분되는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10년간 연출부에서 일하다가 최근 영화사로 들어간 E는 “‘열정페이’를 하려고 한다기보다는 구조 자체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만약 스태프 각 개인이 제작사가 계약하는 표준계약서가 있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외국 어디에도 없는 도제식 스태프 관리

 이런 구조는 영화를 만드는 다른 어떤 나라에도 없는 시스템이다. 영화 산업이 가장 발전한 나라인 미국은 영화 스태프에 대한 표준근로계약 시스템이 가장 잘 갖춰져 있다. 직급을 최대한 세분화해 책정한 최저 임금은 물론이고 영화 예산에 따라 세부조항을 모두 다르게 정해놨다.

 미국 감독조합(DGA: Directors Guild of America)의 협약에 따르면, 스튜디오 촬영은 근로주간 7일 중 이틀은 반드시 쉬어야 한다. 로케이션 촬영은 하루만 쉰다. 여섯 번째 근무일에는 시급의 150%, 일곱 번째 근무일에는 200%를 지급한다. 이보다 더 세세한 규정들은 법적으로 명시됐을 뿐만 아니라 모든 영화인이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있어 노동 착취 같은 일은 일어날 수 없는 구조다. 프랑스, 영국, 독일, 중국, 태국 등도 다르지 않다.

 미국에서 현지 스태프와 함께 영화를 촬영한 경험이 있는 한 관계자는 “임금이 보장돼 있어서 영화 스태프들이 마치 직장인 같았다. 영화가 한창 촬영이 진행 중인데도 저녁 약속을 잡는 걸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점점 붕괴하는 도제식 시스템…임금 체계는 변하지 않아

 현재 스태프로 일하는 이들의 가장 큰 불안감은 ‘퍼스트(first)’, 팀장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대기업 자본이 영화 산업을 지배하면서 투자 시스템이 체계화되고 실력만이 생존 수단이 되면서 누구 밑에서 영화를 배웠다는 게 장점이 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최고 감독으로 평가받는 봉준호, 박찬욱, 최동훈, 김지운 등은 연출부 스태프 경력이 매우 짧거나 없다. 대부분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다가 곧바로 감독으로 데뷔한다. 기술 감독들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다른 쪽에서 경력을 쌓은 뒤 영화계로 건너와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 ‘너도 언젠가 나처럼 될 것’이라며 열정을 강요할 수 없는 구조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스태프들도 무한경쟁 체제로 가는 것 같다”며 “실력이 중요하지 누가 누구를 밀어준다는 건 이제는 큰 의미가 없다”고 했다. 스태프들을 영화 일을 직업으로 하는 노동자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지적이다.

 송낙원 건국대 영화과 교수는 “더는 스태프들에게 희망 고문을 해서는 안 된다. 영화 현장이 교육 현장이 되는 시대는 끝났다”고 짚었다. 송 교수는 “이럴수록 영화 스태프에게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한 표준근로계약서는 필수”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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