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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볼라 긴급구호 의료대원 결심부터 귀환까지 숨겨진 이야기

등록 2015-02-22 12:00:00   최종수정 2016-12-28 14:3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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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이상 와이프가 바가지 긁지 않을 것 같다"

【서울=뉴시스】박대로 기자 = 최근 3주간의 격리 관찰에서 해제돼 귀가한 '에볼라 대응 해외긴급구호대' 1진 소속 의료대원들이 22일 시에라리온행을 결심하게 된 이유부터 귀환 후 소감까지 그간의 소회를 털어놨다.

 긴급구호대 1진은 군 의료진 5명(의사 2명, 간호사 3명)과 민간 의료진 5명(의사 2명, 간호사 3명)으로 구성됐다. 영국 사전 교육을 마친 이들은 지난해 12월21일 시에라리온에 입국해 수도 프리타운 가더리치 에볼라 치료소에서 의료활동을 한 뒤 올해 1월26일 귀국했다. 이후 3주간의 격리관찰을 거쳐 이달 15일 귀가했다.

 귀가 전 취재진을 만난 대원들은 시에라리온행을 결심하게 된 다양한 사연들을 털어놨다.

 육군 간호장교인 오지숙(29) 대위는 "어느날 인터넷뉴스에서 에볼라에 감염됐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행복해하고 고마워하는 모습을 봤다"며 "비록 사망률이 50%에 이른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마지막 순간 따뜻하게 함께 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지원했다"고 털어놨다.

 육군 의무장교인 오대근(39) 중령은 "영상의학과라서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로서 아이덴티티가 부족한 면이 있었다"며 촬영실에서 나와 환자치료에 동참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시에라리온행을 결심했지만 가족과 연인의 반대는 만만찮았다.

 민간 간호사인 박교연(28)씨는 호주에서 간호학을 공부하던 중 한국정부의 의료대원 공고를 보고 참가신청을 했다. 서류전형에 합격했고 이 사실을 부모에게 알렸는데 박 간호사의 부모는 터무니없다며 비행기표도 끊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박 간호사는 "결혼 전에 할 수 있는 것은 다해보고 싶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부모도 딸의 시에라리온행을 허락했다.

 민간 간호사인 홍나연(31)씨는 남자친구에게 구호대원 합격 사실을 알리자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딱 세마디를 했다. "왜, 미쳤어, 죽고 싶어" 그러나 홍 간호사의 아버지는 오히려 딸에게 "네가 자랑스럽다"며 응원을 해줬다. 남자친구도 결국 홍 간호사를 이해하고 성원케 됐다. 

 해군 의무장교인 이태헌(35) 대위의 부모는 아들의 성향을 알고 있는 탓에 일찌감치 전화를 걸어 "혹시 너 에볼라 구호대에 지원하진 않았지?"라며 불안해 했다. 하지만 이미 합격한 상태였던 이 대위는 "전혀 생각이 없다"며 거짓말을 했다. 결국 출국 사실을 알게 된 부모는 눈물로 호소했지만 이 대위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국내에서 교육을 받던 첫날 어머니의 낙상사고(팔 골절) 소식에도 이 대위는 눈물을 머금고 아프리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전쟁터 같았던 시에라리온 현지

 시에라리온 현지에서의 고생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이태헌 대위는 첫날 중환자실에 들어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다가 헛웃음을 지어야 했다. 부츠 안에 신어야 하는 덧신을 부츠 밖에 신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었다. 극도의 긴장 속에 실시한 4시간 가까운 첫 치료활동 후 이 대위의 온몸은 땀범벅이 됐다.

 박교연 간호사도 "낮 근무에 최대 2시간 옷을 입고 일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땀이 너무 많이 나서 옷을 벗을 때 탈수현상이 올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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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료진 수도 턱없이 모자랐다.

 WHO(세계보건기구)는 에볼라환자 1명당 의료진 2.5~5명 정도가 필요하다고 기준을 마련했지만 지난해 12월말 활동 초기 당시 가더리치 치료소에는 환자 34명에 의료진은 25~26명에 불과했다.

 활동 초기 에볼라환자들의 잇따른 사망은 대원들에게 적잖은 심리적 충격을 줬다. 특히 여성 간호사들이 충격을 많이 받았다.

 박교연 간호사는 "병원에서 근무할 때 환자들이 죽어갈 때 간호한 적이 있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에볼라환자들의 갑작스런 죽음을 보면서 심적 충격이 있었다"고 말했다.

 홍나연 간호사도 "죽는 환자를 봐도 슬퍼하지 않고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처음 사망한 어린이 환자를 보고 심리적으로 충격 아닌 충격을 받았다"고 당시 심경을 소개했다.

 이런 상황에서 동료 간호사가 에볼라환자에게 주사를 놓던 중 주삿바늘에 손가락을 찔리는 사고가 발생하자 대원들의 심적 불안감은 더해갔다.

 구호대장인 신형식(51) 국립중앙의료원 감염센터장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우리 동료가 사고로 같이 일하지 못하고 독일로 이송됐던 점"이라고 말했다.

 치료활동 외에도 시에라리온 생활은 여러모로 불편했다.

 아프리카 현지 음식은 입맛에 맞지 않았다. 가더리치 치료소의 운영주체가 이탈리아 비정부단체인 이머전시인 탓에 피자와 파스타로 된 식단도 자주 나왔다.

 먹는 게 변변찮은데다가 극심한 스트레스, 여기에 쏟아지는 땀 탓에 대원들의 몸무게는 날이 갈수록 줄었다. 몸무게가 회복되기 시작한 시점은 한국에서 라면이 도착한 뒤부터였다.

 ◇절망 속에 움튼 희망

 하지만 상황은 점차 나아졌고 현장에선 희망도 움텄다.

 에볼라를 극복한 한 남성은 가더리치 치료소 경비원으로 취업했다. 가족 중 자신을 제외한 전원이 에볼라로 사망했지만 그는 아픔을 극복하고 한국 의료진에게 오히려 감사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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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료 중 감염된 세르비아 출신 간호사는 해당 가더리치 치료소에서 치료를 받고 회복돼 퇴원했다. 이 자리에는 각국의 의료진과 시에라리온 출신 직원들이 모여 그의 퇴원을 축하해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오대근 중령은 "무엇보다 보람됐던 것은 사망 환자보다 퇴원 환자가 많아지기 시작한 날이었다"며 "날이 갈수록 사망 환자보다 퇴원하는 환자가 많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시에라리온 현지에서 하는 가족과의 통화도 타지 생활의 노고를 잠시나마 잊게 했다. 가족들은 모바일 메신저 통화 프로그램을 이용해 대원들의 안부를 물었다. 오대근 중령은 아버지로부터 '사랑한다 아들아'란 문자를 받고 감동을 받기도 했다.

 ◇1개월여만의 귀환 그리고 격리관찰  

 대원들은 1개월여간의 활동 끝에 고국 땅을 밟았지만 대원들은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에볼라 잠복기간인 3주 동안 국내 모처에 격리돼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대원들은 격리상태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조사도 받았다. 환자들이 죽어나가는 현장에서 심리적 외상을 입었을 가능성 때문이었다.

 격리 생활의 따분함을 달래준 것은 역시 가족이었다. 정부는 비접촉 조건부 면회를 허락했고 대원들은 가족과 만나 회포를 풀 수 있었다.

 박교연 간호사는 6시간 동안 차를 타고 격리소를 찾은 부모를 만났지만 포옹을 하지 못했다. 박 간호사는 "오늘 집에 가면 꼭 포옹을 하고 싶다"고 털어놨다. 홍나연 간호사도 면회 때 꽃다발을 가져온 아버지를 안아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신형식 센터장은 귀국하자마자 격리소를 찾아온 아내와 자녀를 만났다. 신 센터장은 "아내의 표정에서 남편이 아주 자랑스럽다는 느낌을, 아이들에게서 아버지가 자랑스럽다는 느낌을 전달 받았다"며 "아마 1~2년 이상 와이프가 바가지를 긁지 않을 것 같다"고 흡족해했다.

 3주에 걸친 격리관찰에 거부감을 느끼는 대원들도 있었지만 대원들 사이에선 불가피한 조치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신형식 센터장은 "사실 에볼라 의료진들의 자발적 격리가 그렇게 과학적이진 않다. 하지만 겨울에 입국해 감기에 걸리면 많은 혼선이 있을 수 있다"며 "자발적 격리가 과학적이진 않지만 아주 현실적이란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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