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권력을 대하는 검찰의 자세

등록 2015-03-03 08:39:24   최종수정 2016-12-28 14:3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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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현미 기자 = 현실 권력과 관련된 정치적 사건이 검찰을 훑고 지나가면 그 자리엔 ‘폐허’가 남는다. 실제로 ‘국가정보원 댓글사건’은 채동욱 전 검찰총장 체제를 무덤으로 만들었다. 청와대와 국정원까지 나서 혼외자 의혹을 제기하면서 채 전 총장은 불명예스럽게 옷을 벗었다. 채 전 총장 체제에서 이 사건 수사 및 보고 라인에 있었던 간부들은 대부분 한직으로 밀려났거나, 이미 검찰을 떠났다.

 검찰이 현실 권력을 정조준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치명적인 대가를 치르면서 깨닫게 한 사건이었다. 학습 효과는 곧 나타났다. 채 전 총장 낙마 이후부터 집요하게 진행된 청와대의 ‘검찰 길들이기’에 대해 검찰 내에선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반기를 들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이 정권 초기 최대 화두였던 ‘정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검찰’은 이미 먼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특히 이 정권 주류인 대구·경북(TK) 출신들이 검찰 내 요직을 두루 차지하면서 청와대와 검찰의 관계는 그 어느 정권 때보다 밀착되고 있다.

 이를 두고 한 검찰 고위 관계자는 “과거부터 늘 하던 방식대로 하는 것일 뿐 특별히 달라진 게 아니다”며 “오히려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검찰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채 전 총장 때가 이례적인 현상으로 봐야 한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과거 검찰이 현실 권력과 관련된 정치적 사건을 다룰 때는 국정원 댓글사건 때와는 달랐을까. 아니다. 현실 권력이 검찰권을 사유화 할 경우 최대 피해자는 언제나 검찰이었다. 가장 최근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부지 매입 의혹사건이다.

 뉴시스 법조팀은 내곡동 사건 당시 TK와 고려대 출신 일색의 검찰 수뇌부가 얼마나 심각하게 이 사건 수사에 깊숙이 개입했는지, 전원 무혐의 결론을 내리기 위해 수사팀을 어떻게 압박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화록을 취재한 바 있다. 이 대화록은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다.

 대화록에 등장하는 검찰 간부 A씨와 B씨는 현재 검찰 내 한직으로 밀려나 있고, 전원 무혐의 결론을 내리도록 일선 수사팀을 강하게 압박했던 한상대 전 검찰총장은 내곡동 사건 종결 후 약 4개월 뒤 검란(檢亂) 사태 등으로 불명예 퇴진했다.   

 ◇수뇌부, 노골적으로 ‘무혐의’ 압박

 검찰이 내곡동 사건을 수사하던 지난 2012년 6월7일 늦은 밤. 검찰 간부 A씨와 B씨는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앞 도로에서 이 사건 처리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A씨가 사건 관계자 전원 무혐의 처리를 요구하기 위해 B씨를 급하게 불렀고, B씨는 A씨에게 청와대 경호처 일부 직원에 대해선 기소할 필요가 있다는 일선 수사팀의 입장을 전달했다. B씨는 A씨를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두 사람은 검찰 내에서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 당시 A씨는 대검, B씨는 서울중앙지검 소속이었다.  

 “왜 실무진을 힘들게 하나. 비겁하다. 차장도 비겁하고, 검사장도 비겁하다. 정 그러면 검사장보고 책임지라고 그래. 차장도….”(A씨)  “조사가 잘 되면 딜레마다. 앞으로 보고할 때 무혐의로 갈 거면 맞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논리를 생각해 봐. 무혐의로 가는데 안 되면 나한테 얘기해 무혐의 사유서 써 줄께. 논란 일으키지 말고.”(A씨)  “모양을 바꾸면 이모(부동산 중개인)씨 꼭 조사해야 한다. 조사할 수 있는 방법을….”(B씨)  “나한테 얘기하면 내가 조사할께. 내가 조사는 하겠다.”(A씨)   “어제 보고서 받고서 고민이 돼서 밤잠이 안 오더라.”(A씨)  “내일 나와서 무혐의 쪽으로 논리를 구성해봐. 어차피 총장님이 맞다고 생각해.”(A씨)  “검사장이 논란 없이 하는 거보다는 남는 거 아니냐고….”(B씨)  “꼭 필요하다고 하면 무혐의로 써봐.”(A씨)

 서울중앙지검 소속 내곡동 수사팀은 다음날인 6월8일 이 전 대통령의 아들 시형씨를 비롯해 김인종 전 청와대 경호처장, 김태환 전 청와대 특별보좌관 등 7명을 전원 무혐의 처리했다. 수사 결과가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바뀐 것이다.

 당초 수사팀은 이 전 대통령이나 아들 시형씨 등에 대해선 사법처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반면, 김 전 처장이나 김 전 특별보좌관 등에 대해선 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배임 혐의로 기소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의 보고서를 검찰 수뇌부에 전달하자 당시 한 총장 측근들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소속 간부들이 수사팀을 전방위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대화록에서 드러났듯이 A씨는 본인이 직접 무혐의 사유서까지 써주겠다고 하는가 하면, 심지어 “대검에서 C씨(일부 기소 필요성 주장한 수사팀 일원)가 좋지 않다”는 협박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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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수사팀은 백기를 들었고 검찰이 수사 결과를 공식 발표하자 ‘봐주기 수사’ 라며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자 정치권은 내곡동 특검법을 통과시켰으며 이를 수용할 수 없다고 버티던 이 전 대통령도 끝내 판사 출신인 이광범 변호사를 특검으로 임명했다.

 이후 내곡동 특검팀은 30일 동안 37명에 대해 50회의 소환·방문 조사를 실시한 후 청와대 경호처 소속의 김 전 처장과 김 전 특별보좌관을 특경가법상 배임 혐의로, 심형보 전 시설관리부장은 공문서 변조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전원 무혐의 처리 방침을 공식적으로 밝히기 전 검찰 수사팀의 판단과 같은 결론이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불구속기소 사유 또한 당초 검찰 수사팀의 의견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내곡동 특검팀은 김 전 처장과 김 전 특별보좌관에 대해선 이 전 대통령의 아들 시형씨의 내곡동 사저 부지 매입금 분담액 일부를 청와대 경호처가 부담하게 함으로써 국가에 9억7200여만원의 손해를 입힌 것으로 판단했다. 당시 특검 측은 “김 전 처장 등은 부지별 감정평가액이라는 객관적 기준을 무시하고 대통령 아들인 시형씨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 사저부지 매입가격과 경호시설 부지 매입가격을 임의로 결정했다”며 “시형씨의 사저 부지를 적정가격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매입할 수 있게 하기로 공모했다”고 밝혔다.

 또 심 전 부장의 경우 경호시설 부지 매입 집행 계획 보고서에서 사저부지와 경호시설 부지의 필지별 합의 금액을 삭제했고, 총 매입대금 40억원으로 기재해 김 전 처장에게 보고한 것처럼 보고서를 조작했다고 지적했다.

 김 전 처장 등은 법원에서 모두 유죄가 확정됐다. 김 전 처장과 김 전 특별보좌관은 1~3심에서 모두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됐다. 심 전 부장은 1심에서 무죄가 나왔으나 2심에서 징역 8월에 집유 2년으로 뒤집혔다가 3심에서 항소심 판단이 최종 확정됐다.

 ◇TK·고대 출신이 검찰 요직 장악  

 내곡동 사건에 대한 특검의 판단과 법원의 선고 결과는 검찰 불신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러자 검찰 내에선 TK 또는 고대 출신들이 법무부와 검찰의 요직을 대부분 꿰차면서 지나치게 이명박 정권과 밀착됐다는 비판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당시 권재진 법무부장관이 대구 출신이었으며, 한 전 총장은 고대를 나왔다. 최교일 서울중앙지검장은 경북 영주에 고대 출신인데다, 대검과 서울중앙지검 간부들 중 상당수가 TK 또는 고대를 나온 한 전 총장 측근들이었다. 내곡동 사건 수사팀에 전원 무혐의 처리 회유와 압박을 했던 것도 TK 또는 고대 출신들이었다. 

 한 전 총장은 이렇듯 이명박 정권과의 교감을 통해 TK·고대 출신들을 전면에 내세워 현실 권력에 충성했다. 그러나 도가 너무 지나쳐 자신의 명운까지 재촉할 것이란 사실은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한 전 총장의 불명예 퇴진은 표면적으로는 검란사태 때문이지만, 그 이면에는 TK 또는 고대 출신들이 장악한 검찰에 대한 뿌리 깊은 검찰 내 불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다른 검찰 고위 관계자는 “내곡동 사건 처리 여부를 놓고 검찰 간부 A씨와 B씨가 서로 나눈 대화는 평소 서로 밀접한 관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얘기들”이라며 “TK 또는 고대 출신들이 당시 검찰 내에서 얼마나 무소불위의 권력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고 지적했다.

 ◇현 검찰 묘한 ‘한상대 기시감’

 한 전 총장 당시 못지않게 현재 검찰도 TK 출신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검찰이 국정원 댓글사건으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공직선거법 및 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하자 청와대 내에선 “TK가 아니면 일을 맡길 수가 없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왔다. 그때부터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TK 출신 일색으로 채워졌고 검찰도 요직에는 TK 출신들을 앉힌 것이다. 

 최근 인사에서도 TK 출신인 박성재 대구고검장이 서울중앙지검장으로 발령났고 역시 TK 출신인 김수남 서울중앙지검장이 대검 차장으로 갔다. 두 사람 인사를 가지고 TK 전진배치라고 할 수 있느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정권에 대한 로열티를 가진 이들과 TK 출신을 고루 배치한 이번 인사의 원칙을 외면한 지적이다. 정권에 대한 로열티가 검증됐다고 하더라도 호남 출신인 경우 그 지근거리에 TK 출신을 사실상 ‘감시자’로 배치한 게 이번 인사의 본질이다.

 이런 상황은 한 전 총장이 내곡동 사건과 관련 측근들을 내세워 전원 무혐의 처리토록 압박했던 것과 같은 상황이 일선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이미 지난해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사건’ 수사 때도 사실상 청와대는 검찰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등 수사 개입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특히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지난 1년여간 검찰 길들이기를 해온데 이어 우병우 민정수석도 이번 인사에서 자신과 친분이 있는 인사들을 서울중앙지검에 전진배치 시킨 만큼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직접 검찰 일선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발생할 가능성은 언제나 상존한다. 이 경우 한 전 총장 때보다 더 심각한 검찰 독립 훼손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이에 대해 검찰 고위 간부 출신의 한 인사는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며 “만일 우려가 현실이 된다면 현 정권이야 5년 임기가 끝나면 그만이겠지만 검찰은 수사권을 내놓는 등 사실상 다음을 기약하기 어려운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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