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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국부' 리콴유, "그는 누구인가"

등록 2015-03-23 10:40:28   최종수정 2016-12-28 14:4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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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AP/뉴시스】현대 싱가포르의 국부격인 리콴유 전 총리가 23일 새벽 향년 91세로 타계했다. 사진은 그가 지난 2013년 3월20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스탠다드 차타드 포럼에 참석했을 때의 모습이다. 2015.3.23
【서울=뉴시스】문예성 기자 = '싱가포르의 국부'로 칭송돼 왔던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가 23일 새벽 91세를 일기로 타계한 가운데 그의 생애가 주목받았다.

 리콴유는 지난 1923년 9월23일 영국 식민지 시절 싱가포르에서 부유한 화교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적은 중국 광둥(廣東)성 다푸(大捕)현인데 이 현은 100세를 넘는 장수 노인이 많기로 유명하고, 지난 1993년 중국 당국으로부터 '장수향(響)'으로 지정됐다.

 그의 조부인 리훈룽(李雲龍)은 영어와 영국 문화를 중요하게 보았기 때문에 리콴유는 영국 문화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수재로 이름났던 그는 1936년 최고명문 레이플스 중고등학교에 입학했다.

 2차대전이 터지면서 가족의 부가 영위되지 않자 그는 일본군 선전·정보부에서 번역 일을 하거나 문구접착제를 만들어 팔면서 가족을 부양했다.

 1945년 8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 후 가족이 돈을 모아 리콴유를 영국으로 보냈다. 그는 처음에는 런던정경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했고, 이후 케임브리지대 피츠윌리엄 칼리지로 옮겨가 법학을 전공했다.

 유학 시절 싱가포르 출신의 유학생들과 정치에 관심을 가졌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이후 1950년 귀국했다. 1955년 그는 아내와 함께 리앤리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고, 1954년 인민행동당(PAP)을 창당하고 사무총장에 올랐다.

 PAP는 1959년 5월30일 열린 총선에서 51석 중 43석을 석권하면서 리콴유는 35세 나이로 영국 식민지 하 싱가포르의 자치정부 총리로 취임했다. 이후 그는 1959년부터 1963년까지 자치정부 총리를 지냈다.

 1963년 국민투표를 통해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했지만 연방의 맹주 말레이시아와 충돌하다가 2년 만에 탈퇴했다. 그는 1965년 7월 말레이 연방에서 독립한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해 1990년 퇴임할 때까지 26년 간 총리로 재직했다. 

 집권 기간 그는 싱가포르의 재정이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서민주택 보급, 공직비리조사국 설치, 해외투자 유치 등의 정책을 시행했다. 

 외교에서는 싱가포르의 국가 위상을 높이는 데 힘썼다. 1967년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창설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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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AP/뉴시스】현대 싱가포르의 국부격인 리콴유 전 총리가 23일 새벽 향년 91세로 타계했다. 사진은 그가 1968년 1월13일 영국 히드로 공항에 도착한 후 기자회견하고 있는 모습이다. 2015.3.23
 1972년 중국과 미국의 국교 정상화 교섭 때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의 자문역을 맡았다.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을 추진할 때는 적극적인 조언자가 됐다.

 31년 간 싱가포르를 통치한 뒤 1990년 후임 고촉통(吳作棟)에게 총리를 물려주고 퇴임했다.

 그러나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내각 자문 역할을 했다.

 업적과 함께 리콴유에게는 '독재자'라는 비판도 따라다녔다. 사회 규율이 엄혹하고, 집회·결사 등이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2004년 그의 장남인 리셴룽(李顯龍)이 3대 총리로 취임하자 세습 논란도 있었다.

 63년을 해로한 부인 콰 여사와 2010년 사별한 뒤에는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2013년 발간된 자서전에서 그는 ‘날마다 몸이 약해져 빨리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도 털어놨다.

 2015년 2월5일 그는 심한 폐렴으로 싱가포르 중앙병원에 입원했고, 3월23일 9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리 전 총리는 싱가포르항만공사를 설립, 세계 일류 수준의 컨테이너 항구를 건설했다. 석유 파동에도 미래에 대비해 창이 국제공항을 건설하는 등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했고, 이뿐만 아니라 그는 세계 유명 금융기관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면서 싱가포르를 아시아 금융의 허브로 만들었다.

 리 전 총리의 혁혁한 공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400달러 수준이었던 싱가포르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그가 총리직에서 퇴직한 1990년에 1만2750달러를 달성했고, 제한된 국토와 부족한 천연자원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선진국으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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