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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립 잡기노트]불변진리, 윤치호·안익태 애국가

등록 2015-06-23 08:03:00   최종수정 2016-12-28 15: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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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안익태 ‘대한국 애국가’ 자필악보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527>

 거짓정보를 담은 책이 잇따라 나왔다. 안익태(1906~1965) 작곡 애국가의 60%는 표절이라는 것이 하나다. 또 다른 하나는 애국가를 안창호(1878~1938)가 작사했다고 강변하고 있다. 

 애국가 표절설은 이미 1970년대 말 명료하게 정리됐다. ‘안익태와 애국가’(김경래·1978)의 부록인 ‘애국가 표절 시비에 관한 소고’(공석준) 이후 그 어느 음악인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1976년 11월 안익태기념사업회가 ‘국가의 상징인 애국가가 일부 국민의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며 국가적인 모욕감마저 느끼는 바’라며 애국가 표절여부를 가려 달라고 요청해서 나온 연구논문이다.

 공 교수(전 연세대 음대)는 ‘그것이 어떻든 삼천만의 가슴에 파고든 우리 겨레의 노래를 앗을 이유는 못 된다’는 사명감으로 애국가를 분석했다. ‘국가의 모든 공식 식전에 사용되고, 외국에서도 한국 국가로 인식돼 왔음은 30여년 간의 일이라 이제 이 선율에 민족의 얼과 사랑이 깃들었고, 그 음률의 장엄함에 국가의 존엄마저 느껴’서다.

 20세기의 애국가 도작 논란은 두 단계를 거쳤다. 1964년 우리나라에서 열린 제3회 국제음악제에 초청된 불가리아계 미국인 페터 니콜로프가 안익태와 갈등을 겪다가 중도 출국한 것이 발단이다. 니콜로프는 한국의 애국가는 불가리아 민요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표절한 것이라며 ‘원곡’의 악보를 한국에 보내도록 했다. 이후 1976년 8월 이 악보는 ‘한국양악 백년사’(이유선)에 실렸고, 저자는 ‘애국가는 표절이니 새로운 애국가를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표절 실랑이는 개인의 원한, 두 번째는 당대의 ‘톱스타’ 안익태가 못마땅했던 국내 음악계의 불만에 기인한 셈이다.

 공 교수는 ‘두 선율은 본질적으로 다른 판도를 그리며 선율 구조가 판이하다’, ‘성악곡에서 두 개 음이 같은 것으로 문제 삼을 수는 없다’, ‘화성구조가 다른 음계의 진행은 곧 공통음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는 골격적, 하나는 구조적 의미이니 이는 성질상 그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설명했다. ‘애국가는 국가의 대행 역할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정식 국가로 제정 공포해야 할 것’이라는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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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애국가는 윤치호(왼쪽)가 작사하고, 안익태가 작곡했다.
 애국가 연구의 태두인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수 십 번을 비교해 들었는데 처음 마디가 비슷한가 싶다 하다가도 반복 마디 쯤에서는 아예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악상이 전혀 다른 곡이다. 처음에는 ‘안익태의 영감?’같은 적극적인 생각도 해봤지만 10여번째 부터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고 전했다. 아울러 “표절이라고 주장하려면 음악적 분석을 통해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인터넷 시대에 불가리아가 저작권료를 요구하지 않는 이유부터 확인해야 할 것이다. 60% 라는 숫자가 음악 비교에서 가능한 것인지 황당할 따름”이라고 일축했다.

 애국가 작사자가 안창호라는 외침은 공허해진 지 오래다. 흥사단이 펴낸 558쪽짜리 ‘애국가와 안창호’(2013) 자체가 증거물이다. ‘도산 해적이’에 애국가 작사 사실이 없다. ‘흥사단 연혁’에서도 1913년 5월13일 흥사단 창립식에서 애국가가 불렸다는 기록은 못 찾는다.

 애국가 시상(詩想)의 핵심은 제1절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표현이다. 1907~1919년 기독교계가 항일운동에 참여한 데는 이 노랫말이 큰 구실을 했다는 것이 정론이다. 조순 전 서울대 교수가 ‘도산(안창호)은 소시 때 기독교에 귀의한 적이 있으나 일찍이 성경의 어구를 인용한 일은 없었다’고 밝혔듯, 감리교 신자 윤치호라면 몰라도 안창호의 시상은 아닌 것이다.

 ‘애국가란 나라와 민족을 상징하는 노래다. 국민의 통일된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노래다. 그러므로 그 국가를 듣고도 아무런 감동이 없는 자는 귀머거리가 아니면 혈맥에 흐르는 피가 다른 이민족일 수밖에 없다. 그때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잠시나마 숙연해진 그들의 태도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이 이 나라의 경찰관일지언정 이민족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경 그들도 그 순간이나마 우리가 자기들의 적이 아니라, 그런 노래도 부를 줄 아는 체내에 흐르는 피가 같은 동족이요 같은 국민이라는 것을 깨닫고, 무슨 위대한 터득이라도 한 듯이 희한해 했는지도 모른다.’

 ‘수구꼴통’의 발언이 아니다. 1965년 장준하가 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강연장에서 윤보선, 함석헌 등과 함께 애국가를 부른 소회다.

 편집부국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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