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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광복70년④]여성독립운동가 '유관순'만 있나?...잊혀진 여성들

등록 2015-08-13 07:00:00   최종수정 2017-01-05 15:2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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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표주연 기자 = 유관순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대명사다.  

 1919년 3·1을 주도하고, 옥고를 치른 뒤 산화한 유관순은 모든 국민의 '누나'이며 '투사'로 수십 년 동안 자리매김해왔다.

 유관순만큼, 아니 그 이상 열혈 독립운동을 했던 여성독립운동가가 많다. 오히려 유관순이 뚜렷이 독립운동했던 기간이 1년인 점을 생각하면 그 이상의 족적을 남긴 여성 독립운동가가 훨씬 많다고 볼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남자는 김구, 여성은 유관순으로 독립운동가가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며 "우리 사회가 독립운동가에 대해 이 둘만 알면 된다는 식으로 스스로 위안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라고 말했다.

 유관순 외에 우리가 기억하면 좋을 발자취를 가진 여성 독립운동가는 누가 있을까? 제2의 유관순, 안옥윤을 찾아봤다.

  ◇'총잡이' 남자현, 영화 '암살' 여주인공 '안옥윤'(전지현)의 모델

  남자현은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에서 태어났다.

 1895년 남편 김영주가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뒤,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해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했다. 이후 남만주 각지를 순회하면서 동포 단합과 군자금 모집 등에서 활약했고, 독립운동가 간호에 힘썼다.

 남자현은 1925년 채찬, 이청산 등 단원 4명과 국내에 잠입해 총독 사이토를 암살할 것을 계획했다. 서울 혜화동 거처에서 거사를 계획했지만, 미수에 그치자 만주로 탈출했다. 바로 영화 '암살'(감독 최동훈)이 차용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남자현은 1920년대 만주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이 부진하자 혈서로써 독립운동 간부들을 일깨운 일화가 유명하다. 남자현이 손가락을 벤 뒤 흐르는 피로 글을 써서 책임자들을 소집하자 간부들은 스스로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1933년에는 이규동 등과 주만 일본대사 부토를 죽이기로 하고, 동지와의 연락 및 무기 운반 등의 임무를 맡았다. 이 임무에서 남자현은 거지 노파 차림으로 중국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를 지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때 남자현은 권총과 비수, 폭탄을 갖고 있었으며, 그가 입고 있던 피 묻은 삼베적삼은 의병 투쟁에 참전했던 남편 김영주가 입었던 옷이었다고 한다.

 체포된 남자현은 6개월 동안 갖은 혹형을 받다 단식투쟁을 전개하고 보석으로 석방됐지만 "독립은 정신으로 이뤄진다"라는 말을 남기고 하얼빈에서 숨을 거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남에는 유관순, 북에는 동풍신  

 서울에서는 유관순이 3·1 운동을 주도했지만, 이북에서는 동풍신이 같은 역할을 했다. '북한의 유관순'이라고 불릴만한 인물이다.

 동풍신은 1919년 3월15일 하가면 화대동 일대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곳은 전날인 3월14일에 일제 공식기록으로 함경북도에서 전개된 만세시위 중에서 최대 인파인 5000여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인 장소다. 이날 일본 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5명이 현장에서 순국했다.

 3월15일 다시 5000여 군중이 화대 장터에 모였는데, 이때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있던 동풍신의 아버지 동민수는 죽음을 각오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병상을 떨치고 일어나 시위에 참여했다. 이날 동민수는 일본군 제 27연대 소속 기마헌병과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현장에서 순국했다.

 소식을 들은 그녀는 현장으로 달려와 아버지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통곡했고, 슬픔을 딛고 결연히 일어나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헌병의 발포로 골목에 몸을 숨기고 있던 시위군중이 크게 감동해 그녀와 함께 다시 시위에 참가했다고 한다.  

 기세를 돋운 시위대는 면사무소로 달려가 사무실과 면장 집, 회계원 집을 불태워 버렸다. 이후 그녀는 결국 일본 헌병에 의해 체포됐으며, 함흥형무소에 수감됐다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다.

 악랄한 고문으로 그녀의 기개를 꺾지 못하자 일제 경찰은 화대동 출신 화류계 여성을 그녀와 같은 감방에 가두고 그녀 어머니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게 시키는 등의 행태로 괴롭혔다.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몇 번을 기절하고 식음을 전폐하다 17세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했다.

 사람들은 남에는 유관순, 북에는 동풍신이라 하는 말로 그의 기개를 칭송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에서 그의 공적을 인정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북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호여성비행사' 권기옥 대한독립군 대령

 영화 '청연'(감독 윤종찬)에서 고(故) 장진영이 연기해 대중에게 알려진 박경원은 대한민국 2호 여성 비행사이었지만, 친일 비행사였다. 박경원은 '황문위군 일만친선 연락비행'이라는 일제의 만주국 승인을 기념 비행을 하다 사고로 죽었다.

 대한민국 1호 여성비행사는 권기옥이다. 박경원과 같은 시대의 인물이지만 권기옥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창공을 날았다.

 권기옥은 1919년 평양 숭의학교에 다니던 중 3·1독립운동에 참가했다. 몰래 태극기를 만들어 운반하는 일을 했던 권기옥은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3주일 동안 구류됐다.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락원인 임득삼, 김정직, 김순일, 김재덕 등과 군자금을 모금하고, 임시정부 공채를 판매해 송금하는 등 독립운동 활동을 벌였다. 이때 권기옥은 다시 경찰에게 붙잡혀 6개월 동안 심한 고문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이후 권기옥은 군자금 모집 혐의로 일제경찰에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멸치잡이 배를 타고 중국으로 밀항, 탈출했으며 비행의 꿈을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권기옥은 임정 추천을 받아 1923년 윈난육군항공학교 제1기생으로 입학해 '여성 비행사'로서 첫발을 뗐다. 항공학교에 입학한 권기옥은 훈련 9시간 만에 단독비행이 허가될 만큼 우수한 학생이었다.

 1925년 항공학교를 졸업한 권기옥은 임정으로 돌아와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겠으니 비행기를 사달라"고 말한다. 단순히 비행사가 되겠다는 조선 소녀의 꿈이 폭탄을 싣고 날아가 조선총독부와 천왕궁을 폭파하겠다는 각오로 변해있었다.

 그러나 임정은 그럴 능력이 없었다. 실망한 권기옥은 1년 동안 의열단원 등과 비행기를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무장행동을 구상하기도 했다.

 이후 권기옥은 한국비행대 편성과 작전계획을 구상했다.1945년 3월 임시정부 군무부가 의정원에 제출한 '한국광복군 건군 및 작전계획' 중 한국광복군 비행대의 편성과 작전이 그의 작품이었다.

 해방 후 권기옥은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했고, 우리나라 공군의 산파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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