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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립 잡기노트]아리랑 악보 역사 10년↑, 헐버트 자필 발굴

등록 2015-08-19 08:03:00   최종수정 2016-12-28 15:2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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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한국명 활보(轄甫),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538>

 미국인 호머 B 헐버트(1863~1949)는 서울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잠들어 있다. 1886년 대한제국 때 첫 서양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 교사로 이땅에 왔다. 1890년 세계사회지리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내고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다. “문자사에서 한글보다 더 간단하게, 더 과학적으로 발명된 문자는 없다”고 확언했다. 고종의 헤이그 밀사 파견을 도왔고 미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일제에 의해 쫓겨난 뒤 1909년 미국에서 집필한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서문에 “나는 1800만 한국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웠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라고 썼다. 1949년 7월29일 광복절을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 초청으로 왔다가 8월4일 별세하기 직전 “나는 웨스터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했다. 8월11일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이 치러졌다. 이듬해 3월1일 건국공로훈장 태극장(독립장), 지난해에는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헐버트의 한국 사랑은 한글에 한정되지 않았다.

 ‘아리랑’을 말하면서도 빼놓을 수 없는 분이다. 입으로만 전해지던 아리랑을 1896년 5선지에 악보로 처음 옮긴 주인공이다. 헐버트가 채록한 아리랑은 고종이 즐겼다는 아리랑, 나운규가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로 삼은 바로 그 아리랑이다.

 한국생활 4개월째로 접어들 무렵 헐버트는 고종의 외교고문 J 데니의 정동 집 근처에서 아리랑을 들었다. 순간의 감동은 여동생 아키에게 편지로 전해졌다. 서한에 아리랑 후렴의 악보를 기재한 것이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와 신나라레코드가 ‘아리랑 기록 120주년 기념 프로젝트’의 하나로 ‘외국인의 아리랑 사랑’을 출판하려고 국내외 자료를 수집하다가 찾아낸 사료다. 지난 4월부터 뉴욕 컬럼비아대 특수문고, 헐버트가 많은 서신을 보낸 베소시스트선교회 출판부, 미국지리학회, 그리고 국내 관련단체와 1993년 한국학 해외자료 수집(Dr. Hullbert’s Letter Book) 등을 추적한 결실이다.

 아리랑 연구의 태두인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사적인 편지에 남긴 악보지만, 오랜 세월을 구비전승(oral-transmission)으로 내려오던 아리랑을 재생 가능한 보편적 기보전승(score-transmission)으로 존재하게 한 최초의 기록이자 최고의 기록”이라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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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서지학자 김연갑
 손자 리처드가 한국학해외자료수집 팀에게 기증한 편지 479통 가운데 1886년 11월12일 토요일 여동생에게 낸 편지의 말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어제 나는 베란다에 앉아 옆집 뜰에서 노는 아이들을 봤다. 그들은 짧은 곡조의 노래를 몇 번이나 불렀고 내가 외울 정도가 됐다. ‘아라렁 아라렁 아라디오(a ra rung a ra rung a radio) 아라 우리손 아라디아(a ra urison a radia)’다. 무슨 말인지는 아직 모르겠구나.” 그리고 후렴 한 줄의 선율을 오선보로 표기했다. (탐구를 거듭한 헐버트는 10년 뒤 이를 ‘한국 합창곡’이라는 논문으로 발표하기에 이른다)

 ‘아라렁’과 ‘아라디아’, 오늘날과 다른 후렴이다. 김 상임이사는 “헐버트가 어린이들의 발음을 정확하게 듣지 못했을 수 있고, 당시에는 유사한 음가(音價)로 불렸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분석한다. “찬송가를 부르는 신학도, 교회음악 지휘경험자, 음악을 즐기는 취향, 오선보에 정확히 4분의 3박으로 채보한 사실 등에 근거하면 단순오류라고는 볼 수 없다”는 판단이다.

 이 편지는 아리랑의 역사를 새로 쓰게 만들었다.

 문헌전승 기록을 헐버트 스스로 경신했다. 아리랑 관련 기존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1896년 ‘코리아 리포지터리’ 2월호 ‘코리안 보컬 뮤직’에 발표한 ‘아라렁’과 악보다.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는 대표사설과 함께 후렴 두 줄을 채보했다. ‘한국인에게 아리랑은 쌀과 같다’는 그 유명한 표현이 실린 인쇄기록이다. 헐버트는 13년 후 ‘대한제국 멸망사’를 펴내며 각국 외교관과 영어권에 아리랑을 재차 소개했다.

 헐버트가 ‘코리안 보컬 뮤직’과 ‘대한제국 멸망사’에 보고한 아리랑은 국제사회로 파급됐다. 1897년 영국 여행가 이사벨라 B 비숍의 ‘한국과 이웃들’(Korea and Her Neighbours), 1907년 의료선교사 호러스 N 알렌의 ‘조선 견문기'(Things Korea), 1908년 뉴욕에서 출간된 W L 허버드의 ‘외국음악의 역사’(History of Foreign Music) 등에서 확인된다. 정한론적 저술로 유명한 일본 법학자 시노부 준페이의 1901년 저 ‘한반도’에도 인용돼 현지 지식인들에게 아리랑의 활용가치를 알렸다. 이 같은 문헌상 전파는 지식층을 통한 아리랑의 세계적 위상 확보라는 점에서 특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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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최고(最古) 아리랑 악보. 19세기 말 헐버트의 영어편지에서 발견됐다.
 김 상임이사는 “헐버트의 두 기록은 아리랑의 전승과정을 연구하는 데 유용한 자료다. 특히 서울지역에서 형성된 아리랑이고 근대성을 띠고 있다는 면에서 다른 아리랑과 대비적 가치가 있다. 근래 헐버트 아리랑 노래비를 건립한 문경시에게도 의미가 각별하다. 노래비의 명칭이 ‘코리안 보컬 뮤직’이 아닌 ‘아라렁’이고, 4분의 2박이 아닌 4분의 3박이며, 뒷면 비문에 헐버트 채보 아라렁과 문경아리랑의 상관관계가 명료하게 적시되지 않아 수정이 요구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우리 민속음악 중 이렇게 문헌으로 존재가 확인되는 것은 아리랑뿐이며, 형성기의 모습이 텍스트로 정확히 남아있는 것도 아리랑뿐이다. 무엇보다 문화사적 가치가 높은 육보(肉譜)가 발굴됐으므로 가치가 클 수밖에 없다. 원본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해달라고 문화재청에 청원할 계획”이기도 하다.

 이미 129년 전 이렇게 세계문화교류사에 편입된 아리랑은 9월 중순 중요무형문화재 제129호로 등록될 예정이다. ‘아리랑 기록 120주년 기념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한겨레아리랑연합회·신나라레코드(회장 김기순)의 뜻대로 육보에 의거한 ‘아리랑비’가 서고, 관련서적이 나오는 것은 남은 숙제다.

 편집부국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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