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문화일반

[신동립 잡기노트]최고 금속활자본 직지, 프랑스가 훔쳐갔나

등록 2015-10-06 08:03:00   최종수정 2016-12-28 15:42:38
  • 크게
  • 작게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이메일
  • 프린트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콜랭 드 플랑시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546>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은 고려 말 승려 백운화상(1299∼1374)이 펴냈다. ‘부처와 큰스님들이 마음의 근본을 올바르게 갖도록 지시하는 중요한 말씀’이라는 뜻이다. ‘불조’는 부처와 고승, ‘직지’는 올바르게 가리키다, ‘심체’는 마음의 본체(바탕), ‘요절’은 중요한 구절이다.

 1377년 백운화상의 제자들은 ‘직지’를 상·하권으로 엮어 금속활자로 인쇄, 발간했다. 그 중 하권 만을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이 소장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으로 UNESCO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자보다 78년이나 앞섰다.

 19세기 말 주조선프랑스공사관 서기관 겸 통역 쿠랑(1865∼1935)이 쓴 ‘조선서지’(朝鮮書誌·Bibliographie Coreenne)는 직지를 이렇게 소개했다. “책은 8절판이며, 두 권 중에서 제2권만 남았다. ‘청주 외곽의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했다’는 책의 마지막 문구가 정확하다면, 조선의 태종이 금속활자로 책을 만들라는 지시를 내리기 26년 전에 이미 고려에서 금속활자를 활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이 책에는 선광 7년이라는 연호가 쓰였는데, 선광은 원나라의 소종이 왕위를 계승한 1371년부터 사용됐다. (따라서 이 책의 발간연도는 1377년이다.)”

 조선서지는 우리나라의 문헌 3821종을 정리한 4권 2098쪽 분량이다. 쿠랑은 1890년부터 21개월 동안 주조선프랑스공사관에서 근무하면서 이토록 방대한 책을 남겼다. 중국과 일본으로 옮겨서도 작업을 계속, 1894∼1896년 해마다 1권씩 3권을 발간했다. 1901년에는 제4권으로 부록을 냈는데, 여기에 직지가 포함됐다. 3821종의 문헌 가운데 3748번째로 등장한다. 

 쿠랑의 조선서지는 플랑시(1853~1922)의 협조 없이는 나올 수 없었다. 프랑스 인쇄업자의 아들인 플랑시는 1888년 6월6일~1891년 6월15일 주조선프랑스공사로 우리 문헌들을 수집해 프랑스 정부에 보고했다. 사적으로 수집한 것도 꽤 있었다고 한다. 쿠랑은 약 1년 간 플랑시의 부하로 있으면서 조선서지를 집필했다. 

 플랑시는 1896년 4월27일 다시 주조선프랑스공사로 부임, 1906년까지 일했다. 이때 직지를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누구에게 어떤 대가(혹은 무상?)를 치르고 구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표지에 프랑스어 자필로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을 뿐이다. “이 책은 1377년 한국의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된 것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다.”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불조직지심체요절
 직지는 1900년 4월부터 11월까지 파리 세계박람회에서 대중에게 공개됐다. 이후 1911년 플랑시가 경매에 출품해 골동품 수집가 베베르의 손에 들어갔다가 1952년 베베르의 손자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한 것으로 돼있다.

 그런데, 플랑시가 1899년 11월30일 휴가차 한국을 떠나 1901년 3월11일 한국으로 귀임할 때까지 프랑스에 1년3개월이나 머물렀다는 사실이 수상하다. 파리박람회를 전후한 바로 이 기간, 쿠랑에게 직지를 비롯한 책들을 조선서지 제4권인 부록에 수록토록 하고 파리박람회에도 전시했으리라는 추정이다.

 직지를 비롯한 우리 책들은 플랑시 개인의 소장품이 아니라 다른 우리 전시품들과 마찬가지로 대한제국 정부 소유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박람회 종료 후 대한제국의 모든 전시품은 반송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정황을 근거로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은 “파리 전시품 도록에서 우리 전시품 목록을 찾는다면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본다. “추정이지만, 분명히 옛날 우리 책들이 있을 것이다. 고서를 보내자고 요청한 인물이 플랑시였을 것이다. 그러면 직지는 플랑시의 개인 소유가 아니라, 조선 정부의 소유물이된다. 세계문화유산이 사기·절도당한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고종이 플랑시에게 파리박람회 물건을 맡겼을 것이다. 플랑시가 1년3개월 간이나 프랑스에 있었던 이유다. 미리 물건을 가지고 가서 조선관도 만들고 전시품 디스플레이도 했을 것이다. 대리공사 플랑시가 1900년 10월27일 전권공사로 승진한 뒤 1901년 3월11일 조선에 왔고, 파리박람회는 1900년 11월5일에 막을 내렸다. 폐막 9일 전에 승진한 것이다.”  

 타당한 추리다. 마국 시카고 세계박람회가 방증이다. 1893년 5월1일부터 10월30일까지 열린 이 박람회에는 조선정부도 참가, 국가전시관을 설치하고 다양한 물품을 선보였다. 고종은 주조선미국공사관 서기관에게 박람회에 출품할 것들을 25t 이상 위탁했다. 물론 대부분 왕실이 제공한 것들이다.

 문화부국장 [email protected]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이메일
  • 프린트
  • 리플
위클리뉴시스 정기구독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