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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미래…'점'에 빠진 헬조선 흙수저들

등록 2016-01-03 07:00:00   최종수정 2016-12-28 16:2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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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명동에 위치한 한 사주카페에서 청년들이 사주를 보고 있다
【서울=뉴시스】이재은 기자 = 지난해 12월28일 밤 서울 명동의 한 사주 카페. 예약하지 않았다면 발길을 돌려야 할 정도 가게 안은 손님으로 북적댔다. 대부분 여성이었다.

 1인당 4000~6000원짜리 차를 시킨 뒤 상담을 받는 데 타로는 6000원부터, 사주는 2만원부터다. 테이블 6개를 가득 채운 손님들은 점술가의 한마디에 숨을 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20대 여성들과 마주앉은 점술인은 열심히 뭔가를 쓰면서 점괘를 읊조렸다.

 이날 이 집을 찾은 직장인 안모(30·여)씨는 이직을 고려 중이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고액 연봉을 받고 있지만, 상사와 자주 마찰을 빚으면서 속병을 앓는 탓이다. 점술가는 "이직 운이 안 좋다"며 "퇴직하면 몇 년 동안 구직이 어려워 백수가 되니 당분간 상사의 비위를 맞춰가며 일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다른 테이블에서는 취업준비생 유모(29)씨가 한창 상담 중이었다. 몇 년째 취업난에 시달려온 그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야 하나 고민하다 이곳을 찾았다. 점술가는 그에게 “사주에 역마살이 있어 바쁘게 움직여야 살 팔자”라면서 여행업이나 무역업 등을 추천했다.

 유씨는 "직장을 구하기도 힘들고, 부모님께 계속 손을 벌리는 것도 죄송하다"며 "예전에는 철학원에 가서 점을 보곤 했으나 사주 카페에 오니 가격도 저렴하고, 분위기도 편해 고민을 털어놓기 쉽더라"고 말했다.  

 새해 운세를 내다보려는 기존 수요뿐만 아니라 ‘헬조선’ ‘흙수저’ 등 신조어가 만연할 정도로 침체한 경기 속에서 모든 미래가 더욱 불안해진 젊은 층의 발걸음까지 더해져 연말 철학관, 사주 카페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또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이나 포털 사이트의 운세 코너에도 클릭이 쇄도하고 있다.

◇점집의 무한변신, 취·이직 상담은 기본, 연애 멘토까지

 지난해 11월 취업포털사이트 인크루트가 취업준비생 38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5명은 취업 때문에 점을 보는 것으로 조사됐다. 현직 직장인 또한 22%가 이직과 관련해 점을 통해 해결책을 찾고 있다고 나타났다.

 한 사주 카페 점술가는 "최근 20~30대 손님들이 부쩍 늘고 있다"며 "연애 운과 결혼 운 등을 많이 묻던 예전과 달리 요즘은 취직 운과 이직 운을 묻는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젊은 층 사이에 점술가를 '멘토'로 여기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가까운 사람에게 털어놓기 힘든 이야기를 제3자인 점술가에게 터놓음과 동시에 조언과 위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H대 4학년 김미현(24·여)씨는 한 달에 두세 번 점집을 찾는다. 김씨에게는 단골 점술가가 '멘토'나 다름없다. 애인과 다투거나 직장에서 문제가 있으면 매일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곤 한다. 복채로 한 달에 100만원까지 지출한 적도 있으나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김씨는 “답답해 누구에게라도 얘기하고 싶은데 개인사를 털어놓기에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 그러나 제3자인 점술가는 비밀 보장도 되고, 조언과 충고를 해주기 때문에 자주 찾게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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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타로점
 직장인 이모(27여)씨는 평소 타로점을 즐겨본다. 특히 남자친구와 다투는 날이면 가장 먼저 타로점을 봐주는 언니가 생각난다. 이씨는 "타로점은 가격도 크게 부담되지 않고, 점술가가 친언니처럼 연애상담도 잘해준다"며 "상담을 받고 나면 불안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시기 때문에 종종 찾게 된다"고 털어놓았다.

◇개명·관상 성형 상담에 면접 의상 선택까지…지나친 의존은 금물

 최근 ‘햄릿 증후군’이라 불리는 결정·선택 장애를 앓고 있는 젊은이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다 돌파구로 점술가를 찾는 경우도 부쩍 늘었다.

 서울 한 명문대 음대 졸업을 앞둔 박모(25·여)씨는 유학 갈 나라를 결정하지 못해 사주 카페를 찾았다. 박씨는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는데 미국과 독일 중 어디로 유학을 가야 할지 고민 중이다"며 "내 사주가 어느 나라와 잘 맞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방문했다”고 말했다.

 한 점술가는 “요즘 사소한 것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청년들이 유독 많다”며 “얼마 전에는 입사시험을 앞둔 한 20대 남성이 시험을 치를 때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골라달라고 하더라”고 일렀다.

 전문가들은 점괘에 일희일비하면서 과하게 의존하는 성향은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최근 취업난에 시달리는 일부 젊은이 사이에 개명과 코끝, 입꼬리 등에 관상 성형을 하는 이들이 급증한 것이 실례다.

 이름이 주는 어감이 좋지 않거나 인상이 나쁘다면 개명이나 성형하는 것을 비판할 수 없다. 하지만 단지 일이 잘 안 풀리니 운명을 바꿔보겠다며 20년 넘게 불린 이름이나 멀쩡한 얼굴에 손을 대는 것은 그릇된 판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충고다.  

 양윤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불확실성이 높은 사회일수록 미신이나 점에 대한 의존현상이 커진다”면서 “과거에는 중·장년층이 점을 많이 봤지만, 최근 청년층이 불확실한 미래에 해답을 얻기 위해 점술가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 그 방증이다”고 짚었다.

 양 교수는 “이들에게 점술가는 일종의 등불 같은 존재일 수 있겠다”면서도 “하지만 점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면 자신의 노력과 실력은 감춰지게 된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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