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바라지 골목' 때아닌 역사 진위 논란…개발 '찬-반' 팽팽
【서울=뉴시스】손대선 임재희 기자 = 이른바 '옥바라지 골목' 개발을 둘러싼 이해당자자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가운데 그 역사성을 둘러싼 논란도 커지고 있다. '역사성이 있느냐, 없느냐'와 '역사성이 있더라도 그 역사성을 증거하는 실제 공간이냐'는 논란이다. 세칭, 옥바라지 골목은 행정구역상으로 서울시 종로구 무악동 47번지 일대를 말한다. 길 건너편에는 일제가 애국지사 등을 대거 투옥시켰던 서대문형무소가 자리 잡고 있다. 낡은 저층주택과 여관들이 밀집한 이곳은 조선총독부가 1914년 경성부의 행정구역을 법적으로 개편한 이후부터 1975년까지 '서대문구 현저동'이라는 행정구역에 속해 있었다. 이곳은 2000년대 초반부터 주민들을 중심으로 재개발이 추진됐다. 2004년 조합추진위가 구성됐고 2006년에는 정비구역으로 지정됐다. 지난해 7월 관리처분인가가 떨어졌고 올 1월부터 철거가 시작됐다. 재개발 추진에 따른 이주도 이어져 지금은 기존 주민중 18가구 약 40여명만이 남아있다. 개발이 완료되면 1만1058㎡에 지상 16층, 195가구 규모의 아파트가 들어선다.
이주를 거부하는 주민들을 주축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된 애국지사들의 옥바라지를 한 가족들의 애환이 서린 이곳을 역사도시재생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역사학자, 예술가들이 가세해 개발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이에 개발 지연에 따라 추가 분담금이 늘어날 것을 우려하는 조합측이 이에 반발하는 형국이다. 개발 반대측은 1907년 세워진 서대문형무소와 옥바라지 골목을 항일역사의 틀 안에 담고자 한다. 옥바라지 골목은 백범 김구선생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이곳에 머물면서 옥바라지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외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애국지사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가족들이 이 골목의 여관에서 기거한 곳으로 알려졌다. 이곳에서 37년째 살고 있는 원주민 최모(여)씨가 1일 공개한 자료 따르면 1919년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에게 폭탄을 던져 사형을 당한 강우규 의사는 서대문형무소 수감시절 자신을 옥바라지하는 가족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동생들과 누이를 합해 세 사람이 서대문감옥 앞 현저동 29번지 윤홍식 집에 간신히 방 두 칸을 빌려서 함께 살고 있는데, 아무리 조밥을 먹더라도 한 달에 3, 40원은 있어야 하겠으며 사식을 들이는 데에 적어도 8, 90원 가량은 있어야 하겠는데, 덕천 큰 집에서도 그 동안에 적지 않은 돈을 가져왔으므로 지금은 더 가져오라고 해도 가져올 돈이 없고, 밭떼기와 논마지기 있는 것을 팔고 오려 해도 가지도 못하게 될 것이고, 금융이 핍박하여 실로 어렵습니다."(동아일보 1920년 8월 11일) 개발반대측은 구불구불하고 좁은 골목에 담긴 옥바라지에 얽힌 애환을 후손들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듭하고 있다. 인근 서촌이나 북촌처럼 골목을 보존하고 게스트하우스, 카페 등을 만들면 역사문화 관광 자원으로 충분히 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현실적인 이해관계도 없지 않아 보인다.
이씨는 "어쨌든 이 동네를 벗어나고 싶지 않다. 중고생들이 서대문형무소나 옥바라지 골목이 뭔지나 알까. 이곳은 사통팔달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역사문화 공간이 되면 손주들에게 이 골목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개발반대측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는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은 기자에게 "서대문형무소는 왜 보존하는지 묻고 싶다. 형무소는 일제 잔재이자 애국지사들의 항일을 상징한다. 그럼 애국지사들의 옥바라지를 한 이들은 무엇인가. 그들 역시 일제에 저항한 이들이다"고 말했다. 다케시 연구원은 "투옥된 애국지사들은 바깥의 도움 없이는 견딜 수 없었다. 가족들의 옥바라지가 있어서 그나마 견딘 것이다"며 "옥바라지는 가사노동과 같다. 흔적은 안 남는다. 궁궐이나 고궁이 아니다. 다닥다닥 붙은 좁은 골목이 바로 저항의 흔적이다. 서대문형무소와 같이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당시 옥바라지 골목의 진위를 증거할 사료나 근거는 빈약한 편이다. 반대측은 옥바라지 골목의 역사성 등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역사학계 관계자들과 찾고 있다. 조합측은 이 같은 점을 집요하게 문제 삼고 있다. 조합측이 소개한 원주민 이상부(90) 할아버지는 옥바라지 골목의 역사성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그는 최근까지 이 골목에서 아내와 함께 세탁소를 운영했다고 한다. 그는 "내가 열네 살 때, 그러니까 쇼와(일본왕 히로히토 시대의 연호)14년에 경성에 올라와 여기서 76년을 살았다. 소학교에서 소사노릇하면서 여기서 결혼까지 해 자식들 다 출가시켰다"며 "여기가 무슨 옥바라지 골목인가. 당시에는 이곳은 다 밭이어서 똥지게 지고 다녔다. (개발반대측 주장대로)옥바라지 골목이 있다면 지금 독립문 쪽 영천시장 방향이다"고 말했다. 조합측은 일부 주민들이 보상을 노리고 역사성을 내세우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같은 갈등의 빌미는 아이러니하게도 철거를 허가한 종로구가 제공했다. 종로구는 이미 지난 2010년 동네 골목길 관광코스 안내지도에 옥바라지 골목을 포함시켰고, 실제로 옥바라지 골목 어귀에 안내판까지 세웠다. 종로구는 동네골목길 관광 제6코스-무악동이라는 안내판을 통해 이곳을 '서대문형무소 옥바라지 아낙들의 임시기거 100년 여관골목'이라고 관광객들에게 소개했다. 주민들의 연이은 민원에 최근 서울시는 옥바라지 골목의 역사적 가치를 좀 더 면밀히 살펴보자는 신중론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다만 관할 종로구청에 이를 강제할 수는 없는 한계가 있다. 지난달 14일 종로구에서 철거를 허가하자 시는 즉각 철거유예를 요구했다. 30일에는 이해당사자들을 시청에 불러 조정을 시도했지만 전척이 없었다. 시 관계자는 "김구 선생이 옥바라지 했다는 기록 등이 있는데 역사성이 맞는지 확인하고, 노후화 등 조사 할 게 필요해 철거를 유예해달라고 요청했다"며 "남아있는 18개 가구에 대해 조합이 명도소송을 해 4월 말 결과가 나온다고 한다. 법적으로 강제하기 전에 사접협의를 하고, 안되면 도시분쟁조정위원회를 열어야 한다. 종로구가 당분간이라도 철거를 유예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옥바라지 골목 인근에서 3년째 커피숍을 운영하는 A씨는 자신은 재개발과 상관이 없다면 서도 "십몇 년 전인가 재개발 얘기가 들리면서 모든 게 정체된 상태"라며 "하루속히 문제가 해결돼 주민들 간에 갈등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역사문제연구소·역사학연구소·한국역사연구회 3단체는 성명을 내어 서울시가 인문중심의 도시재생정책으로 가야한다며 종로구와 건설사의 철거를 제동을 걸고 옥바라지 골목 보존을 위한 구체적 행동에 들어갈 것을 요청했다.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