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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진잼·가차샵 그리고 시발비용…씁쓸한 청년 소비 트렌드

등록 2017-06-21 08: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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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탕진잼’은 소소하게 낭비하는 재미를 의미한다. 불과 1000~3000원 정도 되는 저렴한 물건들을 그 돈만큼 사야 한다. 한 마디로 한정된 재화로 최대한 소비한다는 의미인 셈이다. 사진은 ‘탕진잼의 성지’로 불리우는 다이소 매장. (사진=다이소 제공)
【서울=뉴시스】김정환 기자 = #1. 취업 준비생 최모(29)씨는 요즘 되는 일이 없다. 새 정부 들어서 일자리 문이 활짝 열릴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런 기쁜 소식은 아직 들려오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에만 해도 속상하거나 열 받는 일이 있으면 친구와 만나 술 한 잔을 하면서 요즘은 그런 여유도 누리지 못 하고 있다. 술을 다른 사람과 함께 먹는 것은 드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시간 소모도 만만찮아서다.
 
 이럴 때 혼술(혼자 술 마심)을 하지만, 그러기에도 마음이 편치 않다면 비상금 중 몇 만원을 꺼내 들고 시내 대형서점에 간다.
 
 서점에서 그가 가는 곳은 도서 판매대가 아니다. 서점에 함께 있는 문구 코너다. 이번에 그는 볼펜 판매대에 멈춰섰다. 1000원대부터 1만원대까지 다양한 국내외 볼펜 브랜드가 늘어선 것이 마치 "날 데려가세요"라고 외치는 듯하다.
 
 최씨 그 중 1000~2000원대 볼펜을 색상별로 구입했다. 들인 돈은 1만5000원 남짓. 한 움큼 손에 쥔 볼펜을 보며 그는 묘한 만족감에 미소를 짓는다. 동시에 스트레스가 사라짐을 느낀다.
 
 최씨의 원룸에는 이미 형광펜 20여 개, 사인펜 20여 개, 샤프 펜슬 10여 개 등 다양한 필기구가 있다.
 
 최씨는 필기구 컬렉터는 절대 아니다. 단지 스트레스를 받을 때 필기구를 구입하면 적은 돈으로 기분도 풀고, 공부하는 데 필요한 것을 앞서 구입한다는 명분도 있어 즐겨 구입할 쁜이다.
 
 #2. 서울 H대 2학년 이모(23·여)씨는 시내 화장품 가게를 가끔 찾는다.
 
 거기서 그가 구입하는 것은 발라보고 칠해볼 수 있도록 샘플을 늘어놓은 화장품이 아니다. 뭐가 들어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랜덤 박스'다. 가격은 3만원 선인데 그 안에 각종 화장품이 다 들어있다.
 
 언젠가 구입한 랜덤박스의 경우 총 10만원 넘는 화장품이 들어있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3만~4만원 정도의 화장품들로 채워졌다.
 
 이씨는 이번에 구입한 화장품 랜덤박스 개봉 모습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공개할 계획이다.
 
 이씨가 팔로윙하는 인스타그래머 중 한 명이 이를 생중계해 호응을 얻은 것은 물론 필요 없는 상품을 다른 인스타그래머에게 즉석에서 판매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탕진잼이 뭔가요?” “가차샵? 짝퉁 파는 가게인가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데 도대체 뭔 뜻인지 모르는 낯선 말들이 범람하고 있다. ‘가성비’가 ‘가격 대비 성능’을 의미하고, ‘혼밥’이 ‘혼식’이 아니라 ‘혼자 먹는 밥’의 줄임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 불과 몇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새롭게 알아가야 할 단어, 누군가의 통역이 필요한 말들이 지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이 중에는 젊은 층의 소비 트렌드를 함축하는 말도 여럿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탕진잼이다. ‘탕진(蕩盡)하는 재미’의 줄임말이다. ‘탕진’은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재물 따위를 다 써서 없앰”이라고 나온다. 탕진잼은 말 그대로 ‘돈을 물쓰듯 다 쓰는 재미’인 샘이다.
 
 그렇다고 재산을 모두 쓰는(탕진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2만~3만원 정도의 돈을 정해 이를 다 쓰는 것이다. 다만 이 돈으로 어느 한두 가지를 구입하느라 돈울 다 쓰는 것은 탕진잼의 탕진이 아니다. 불과 1000~3000원 정도 되는 저렴한 물건들을 그 돈만큼 사야 한다. 한 마디로 한정된 재화로 최대한 소비한다는 의미인 셈이다.

 가챠샵은 일본어와 영어의 합성어다. ‘가챠’는 일본의 캡슐 토이 자동판매기인 가챠폰(ガチャポン)에서 유래했다. 여러 종류의 상품이 들어있는 자동판매기에서 무작위로 캡슐을 뽑는 것처럼 뭐가 나올지 모르는 가챠 상품을 판매하는 가게(숍)를 뜻한다.
 
 이들 가게에는 일본과 미국의 갖가지 캐릭터 상품을 담은 캡슐을 넣은 자판기가 있어 손님은 돈을 넣고 원하는 캐릭터 상품에 도전하게 된다. 원하는 캐릭터 상품이 나올 확률은 사실 그리 높지 않지만 막연한 가능성에 도전하는 재미로 인기를 끌었다. 인형 뽑기와 달리 최소한 돈 날릴 염려가 없다는 점이 부각되며 더욱 인기를 모으고 있다.
 가차샵이 인기를 끌면서 덩달아 떠오른 것이 ‘랜덤박스’다. 캡슐 토이를 자판기가 아닌 숍에서 직접 구입하는 것으로 여러 종류의 캐릭터 상품 중 하나를 작은 박스 안에 담아 파는 개념이다.
 
 자판기보다는 원하는 캐릭터 상품을 손에 넣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장점이다. 랜덤박스는 아제는 각종 화장품을 박스에 담아 파는 화장품 랜덤박스, 갖가지 학용품을 박스에 담아 파는 학용품 랜덤박스로 영역이 확대됐다.
 가차샵에서 원하는 상품을 구할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자 나름대로 자구책도 등장했다. 원하지 않은 상품이 나왔을 경우 이를 모았다 인터넷 중고시장을 통해 원하는 사람에게 판매하거나 SNS를 통해 이용자끼리 물물교환을 하는 방식이다.
 
 신조어 중에는 ‘시발 비용’도 있다. 대부분 이 단어를 처음 듣게 되면 ‘어떤 일이 처음 시작할 때 들어가는 비용‘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시발을 시발(始發’ 일이 처음으로 시작됨).’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시발은 180도 다른 말이다. 시중에서 흔히 사용되는 비속어다. 여기에 비용을 합쳐 ‘화가 나서 욕하며 쓰는 돈’ ‘스트레스 때문에 욕하며 쓰는 돈’을 의미한다. "만원 지하철에 열 받아서 출근길에 러시아워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택시를 탔다" "선배의 이기주의에 질려 차리리 내가 후배들에게 거하게 한잔 쐈다"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전문가들은 요즘 유행하는 신조어 내지는 소비 트렌드가 경기 불황기, 취업 빙하기에 적은 돈을 들여 최대한 만족감을 느끼려고 발버둥 치는 젊은 세대의 현실적 고민이 녹아 있다고 본다.
 
 이호규 남예종예술실용전문학교 연기예술학과 교수는 "'소비가 미덕'이라고 해선 소비를 부추긴 때도 있었고,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해서 저축을 장려한 때도 있었다"면서 "말은 시대상을 반영하는 만큼 돈을 쓰고 싶지만 쓸 돈이 없는 요즘 젊은 세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소비인셈이다. 심지어 시발 비용마저 자신이 불요불급한 데 돈을 쓴 것을 부끄러워하며 적당한 명분을 찾는 것일 수도 있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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