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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실패에 관하여···'덩케르크'

등록 2017-07-19 08:33:22   최종수정 2017-07-25 09: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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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관람을 방해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음)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덩케르크'(감독 크리스토퍼 놀런)는 실패에 관한 이야기다. 1940년 5월 연합군 40만명이 프랑스 덩케르크 해변에서 독일군에 의해 고립됐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사건을 흔히 '덩케르크 철수 작전'으로 그럴싸하게 명명하지만, 철수는 사실상 전투에서 진 것을 의미한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이건 적과 싸우지 않고 도망친 역사다. 승리를 향한 의지는커녕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치는 한 병사의 모습이 담긴 오프닝 시퀀스는 상징적이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이 실패를 체험하게 한다. IMAX·65㎜ 카메라를 활용한 압도적인 영상, 당시 실제로 쓰인 전투기를 사들일 정도로 컴퓨터그래픽을 최대한 억제한 집요한 연출, 106분 내내 온몸을 조여오는 듯한 음악과 음향. 두 시간이 안되는 시간에 잔교에서의 일주일, 바다의 하루, 하늘 위 한 시간을 모두 절절하게 느끼게 하는 경험이 '덩케르크'다. 그리고나면 질문 하나가 던져진다. '왜 이 처절한 패배를 경험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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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패배의 정체는 좌절에 휩싸인 덩케르크 해변의 공기다. 전투 결과는 이미 패배로 결정, 문제는 승패가 아니라 오직 생사다. '다크나이트' 시리즈 '인셉션' '인터스텔라' 등 놀런의 전작은 화려함으로 꽉 차있었다. '덩케르크'는 반대다. 대사를 줄였고, 독일군은 등장하지도 않는다. 피도, 진한 전우애도, 현란한 전투 시퀀스도 없다. 이는 형식적 실험이라기보다는 고립된 이들이 느끼는 무력감을 정확하게 드러낸 표현에 가깝다.

 '덩케르크'는 절망의 끝으로 전진한다. 필사적으로 탈출하려는 병사들에게 밑으로는 어뢰를, 위로는 폭격기를 선사한다. 이들을 돕기 위해 덩케르크 해변으로 향한 민간 선박에 탄 사람들에게는 예기치 못한 또 다른 고통을 안겨준다. 독일 전투기를 격퇴하기 위해 출발한 스핏파이어 세 기 중 두 기는 격추당했고, 나머지 한 기에는 연료가 없다. 이제 선택해야 한다. 포기하고 멈춰버리든지, 아니면 뭐가 됐든 끝까지 버텨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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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 놀런 감독의 전작이 소환된다. '인터스텔라'는 "우린 답을 찾을 거야. 언제나 그랬듯이"라며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한다.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누구든 영웅이 될 수 있어. 소년의 어깨에 코트를 덮어주며 세상이 끝난 건 아니라고 다독이는 것처럼 사소한 일을 하는 사람도 영웅이지"라고 했다. 그의 영화들은 무작정 낙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희망을 쉽게 내던진 적이 없다. '덩케르크' 또한 그렇다.
 
 '덩케르크'에 없는 또 한 가지는 캐릭터다. '인터스텔라'와 '다크나이트'에는 각각 '쿠퍼'와 '배트맨'이라는 영웅이 있었다. 영웅 서사를 만들던 놀런 감독은 이번엔 '공동체 서사'로 나아간다. 카메라가 쫓는 건 특정 집단을 대표하는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그들 중 한 명'이다. 그러니까 '덩케르크'에는 주인공이 없는 게 아니라 공동체 자체가 주인공이다. 이들은 각자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코트를 덮어주며 어깨를 다독이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이 움직임은 결국 작은 변화(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않게)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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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의 행동은 인간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숭고한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판단 아래 행해진다. 토미는 우연히 자신과 긴 시간 함께한 국적 불명의 동료를 위험을 무릅쓰고 지키려 한다. 도슨은 언제라도 배를 돌려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파리어가 전투기를 퇴각했다고 해도 문제될 건 없었다. 그는 복귀할 연료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기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한 가지를 위해 모든 걸 걸었다.

 '덩케르크'는 전쟁을 통해 일시적인 카타르시스를 분출하는 대신 이 세계를 오래 지속 가능하게 하는 이상들을 단단히 새겨넣는다. 사령관은 부하들을 먼저 탈출시키고, 끝까지 남아 마지막까지 연합군의 귀향을 돕는 리더다. 도슨은 기성세대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세계의 미래를 위해 기꺼이 책임지고 희생할 준비가 된 어른이다. 피터는 살아남은 자의 희망을 지키고, 떠난 이의 넋을 기려 인간의 존엄을 지킬 줄 아는 청년이다. 누구도 군인을 비난하지 않고, 살아온 것만으로 충분하다며 '우리의 패배'를 함께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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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런의 새 영화는 갈수록 절망과 좌절의 크기를 키워가며 불화하는 세계를 향한 메시지다. 2014년 4월16일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또 큰 좌절을 겪은 우리를 위로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크든 작든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는 모든 이에게 가닿을 수 있다. 놀런은 관객이 거대한 실패를 경험하게 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이뤄낼 수 있는 작은 성공을 맛보게 해 미래를 향한 희망을 놓지 않게 한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 이후의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피해를 최소화해 덩케르크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연합군은 이를 발판 삼아 다시 한번 독일군에 맞섰고, 2차 세계 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덩케르크에서 기어코 살아남아 지켜내려 안간힘 쓴 그 작은 희망이 이 승리의 토양이 됐다. '덩케르크'는 실패에 관한 이야기다. 이 실패에 한 단어가 더 붙어야 한다. 이건 성공한 실패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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