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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일 별세, 한국영화사의 상징 ★ 지다···데뷔 반백년

등록 2018-11-04 07:17:03   최종수정 2018-11-12 09: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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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신효령 기자 = 영화배우 신성일(81)이 4일 오전 2시30분 폐암으로 숨을 거뒀다.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했다.

병색이 완연한 가운데도 지난달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는 등 대배우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신성일은 한국 영화사의 상징과도 같은 배우다. 영화 507편을 주연, 한국 영화 발전에 기여했다. 1960∼1970년대 충무로에서 영화와 함께 청춘을 보냈고 최고의 인기를 누린 톱스타다. 상대역으로 출연한 여배우만 119명에 달한다. 신성일과 함께 가장 많은 작품을 한 여배우는 윤정희(74)로 99편에 함께 출연했다.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경북도청 공무원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릴 적부터 걸출한 용모에 공부도 잘 하는 모범생이었다.

대구 수창초등학교, 영덕중을 거쳐 명문 경북고에 합격했다. 서울대 진학이 목표였으나 2학년때 꿈을 접어야 했다. 어머니가 운영하던 계가 깨지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빚쟁이들을 피해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다. 서울대 상대에 원서를 넣었으나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었던 환경 때문에 떨어졌다.

 방황하던 신성일은 청계천에서 두세 달 호떡 장사를 했다. 재수를 하던 중 우연히 한국배우전문학원에 들어가고, 1957년 신상옥(1926~2006) 감독이 운영하던 '신필름' 배우 모집에서 높은 경쟁률을 뚫고 전속배우가 됐다. 그때 신 감독으로부터 '뉴스타 넘버 원'이란 뜻의 '신성일(申星一)'이란 예명을 받게 된다. 성은 신 감독의 성씨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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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으며, 1960년 신 감독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했다. 코미디를 가미한 멜로 드라마로 유례없는 히트를 기록했다. 조각 같은 용모와 강렬한 눈빛으로 반항아적인 매력을 발산하며 독보적인 스타가 됐다.

1962년 '아낌없이 주련다', 1963년 '가정교사' '청춘교실'로 스타덤에 올랐다. 1964년 김기덕(1930~2017) 감독의 '맨발의 청춘'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뒤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로맨스 빠빠'에서 처음 만난 배우 엄앵란(82)과 1964년 결혼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두 사람의 결혼식에는 하객과 시민 4000여명이 몰려 큰 화제를 모았다.

'떠날 때는 말없이'(1964) '초우'(1966) '별들의 고향'(1974) '겨울 여자'(1977) 등 숱한 히트작을 내놓았다. 1966년에는 한 해 동안 89편의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다.

1979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지낸 고인은 영화 제작에도 참여했고,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제작·감독한 작품은 '연애교실'(1971) '어느 사랑의 이야기'(1971)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1971)이다. 감독한 영화는 '그건 너'(1974), 제작작은 '코리안 커넥션'(1990) '남자시장'(1990) '물위를 걷는 여자'(1990)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991) '열아홉 절망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노래'(1991) '안개 속에서 2분 더'(1995)다.

원래 이름은 강신영, 예명이 신성일이다.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강신성일로 개명했다. 1981년 11대 총선 서울 용산·마포구에 한국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2위로 낙선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대구 동구 갑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2000년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동구에서 당선돼 의정 활동을 했다. 2001년 한나라당 총재특보를 지냈다. 17대 총선에는 정당 공천을 받지 못해 불출마했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뒤에도 영화와 관련된 일에 앞장섰다. 2002년 춘사나운규기념사업회 회장, 2003~2005년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 이사장, 계명대학교 특임교수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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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영화상 인기상(1963~1973), 아시아 영화제 남우조연상(1979),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1968),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1986),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1990),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1994), 대종상영화제 영화발전공로상(2004), 제28회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특별공로예술가상(2008), 제17회 부일영화상 영화발전공로상(2008), 제8회 대한민국영화대상 공로상(2010), 제47회 백상예술대상 공로상(2011), 제3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공로상(2013), 제37회 황금촬영상 공로상(2017), 한국영화를 빛낸 스타상 공로상(2017) 등을 받았다.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올해 '제8회 아름다운 예술인상' 공로예술인상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9일 서울 충무로 명보아트홀에서 열릴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됐다.

영화계에서는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영화인장을 치르는 방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으로는 부인 엄앵란 여사, 아들 강석현(51)씨, 딸 강경아(53)·수화(48)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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