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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지워버리는 사랑, 앨리스 먼로 단편집 '거지 소녀'

등록 2019-02-24 11:14:25   최종수정 2019-03-04 10:5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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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신효령 기자 = "그들은 서로에게 긴 편지를 썼다. 사학자는 그는 예의바른 남자로, 재치있고 섬세한 연애편지를 써 보냈다. 로즈는 패트릭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리면, 그녀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바랄까봐, 망상을 가질까봐, 톰이 편지를 더 뜸하게, 혹은 더 방어적으로 쓰지는 않을까봐 조금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는 그렇게 저속하지는, 혹은 비겁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녀를 신뢰했다."

캐나다 작가 앨리스 먼로(88)의 소설집 '거지 소녀'가 번역·출간됐다. 먼로는 현대 단편소설의 대가로 꼽힌다. 2009년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맨부커상, 2013년 세계 최고 권위의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표제작을 비롯해 '사이먼의 행운' '야생 백조' '스펠링' '자몽 반 개' 등 10편이 담겼다. 각 단편은 주인공 '로즈'와 연결돼있다. 유년기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40년의 세월에 걸친 생애의 어느 한 시기를 다룬다. 때로는 한 단편 속에서 수십 년을 훌쩍 뛰어넘기도 한다. 단편 각각이 자체만으로 완결성을 갖췄으며, 그 단편들이 모여 커다란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로즈는 누추한 환경에서 나고 자란 여성이다. 가족으로는 가구 수선 일을 하는 아버지, 새어머니 플로, 이복동생 브라이언이 있다. 부유한 집안 출신인 패트릭을 만나 결혼하지만 극심한 갈등과 중산층의 폐쇄적 삶에 대한 환멸때문에 10년 만에 이혼한다. 어느 한 곳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떠돈다. 끊임없이 외로워하고, 누군가에게 희망을 품었다가 좌절하고, 다시 다른 사람을 찾아 절박한 마음으로 헛된 희망을 품는다.

먼로는 로즈의 삶을 결코 미화하지 않는다. 냉정하고 태연한 목소리로 로즈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자리한 허영과 나약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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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먼로
"그녀는 생각했다. 사랑은 세상을 지워버린다고, 사랑이 잘되어갈 때만이 아니라 망가지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라고. 놀라울 것도 없는 생각이었고 실제로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정말 놀라운 것은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아이스크림 접시처럼 두껍고 평범하게 제자리에 있어주기를 바라고 요구했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녀가 달아나며 벗어나려 하는 것은 실망, 상실, 파경만이 아니며 그와 정반대되는 것, 즉 사랑의 축복과 충격, 그 눈부신 변화이기도 한 것 같았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원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있어서인데, 자기 안에 그것이 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것인가?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아내, 애인, 하고 생각했다. 그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말들. 그 말들이 어떻게 자신에게 적용될 수 있을까? 그것은 기적이었다, 실수였다. 그것은 그녀가 꿈꿔온 것이었다, 그녀가 바라지 않는 것이었다." 민은영 옮김, 396쪽, 1만4500원,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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