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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호 별세]항공산업의 선구자로 일생을 수송보국에

등록 2019-04-08 10:08:17   최종수정 2019-04-15 09:2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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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속 빛났던 리더십... 글로벌 항공사 ‘대한항공’으로 우뚝 세워

스카이팀 창설...개별 기업을 뛰어 넘어 韓 항공산업 위상 드높여

민간 외교관으로 맹활약·국가에 대한 소명의식... 평창동계올림픽 이끌어

성공·굴곡 속에서도 책임과 원칙은 중시...열정적으로 살아왔던 경영자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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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김종민 기자 =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4월 8일 새벽(한국시간) 미국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0세.

조 회장은 1949년 3월 8일 인천광역시에서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 회장은 서울에서 경복고등학교를 수학한데 이어 미국으로 유학해 美 메사추세츠 주 Cushing Academy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인하대 공과대학 학사,  美 남가주대 경영대학원 석사, 인하대 경영학 박사 학위 등을 취득했다.

조 회장은 1974년 대한항공에 몸 담은 이래로 반세기 동안‘수송보국(輸送報國)’ 일념 하나로 대한항공을 글로벌 선도항공사로 이끄는데 모든 것을 바쳤다. 또 대한민국 항공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비전을 제시하고, 대한민국 항공산업의 위상을 제고하는 등 국제 항공업계에서 명망을 높이며 사실상 대한민국 항공산업의 선구자 역할을 해왔다.

◇위기 속 빛났던 리더십... 글로벌 항공사 ‘대한항공’으로 우뚝 세워

조 회장은 1974년 대한항공 입사 후 45년간 정비, 자재, 기획, IT, 영업 등 항공 업무에 필요한 실무 분야들을 두루 거쳤다. 이 같은 경험은 조 회장이 유일무이한 대한민국 항공산업 경영자이자, 세계 항공업계의 리더들이 존경하는 리더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원천이었다.

조 회장은 1992년 대한항공 사장, 1999년 대한항공 회장, 2003년 한진그룹 회장 자리에 올랐다. 조 회장은 재직기간 중 대한민국의 국적 항공사였던 대한항공을 전 세계에서 주목하는 글로벌 선도 항공사로 거듭나는 발판을 마련했다.

조 회장이 대한항공에 몸을 담은 이래 회사의 존폐를 흔드는 위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조 회장은 세계 항공업계 무한 경쟁의 서막을 항공동맹체인 ‘스카이팀(SkyTeam)  창설 주도로, 그리고 전 세계 항공사들이 경영 위기로 움츠릴 때 앞을 내다본 선제적 투자로 맞섰다. 결국 대한항공은 결국 이들 위기를 이겨내고 창립 50주년을 맞을 수 있었다.

조 회장은 탁월한 선견지명의 혜안으로 위기의 순간을 기회로 만들었다.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자체 소유 항공기의 매각 후 재 임차를 통해 유동성 위기를 극복했으며, 1998년 외환 위기가 정점일 당시에는 유리한 조건으로 주력 모델인 보잉737 항공기 27대를 구매했다. 또한 이라크 전쟁, SARS 뿐만 아니라 9.11 테러의 영향이 아직까지 남아있어 세계 항공산업이 침체의 늪에 빠진 2003년 조 회장은 이 시기를 차세대 항공기 도입의 기회로 보고, A380 항공기 등의 구매계약을 맺었다. 결국 이 항공기들은 대한항공 성장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조 회장은 전 세계 항공업계가 대형항공사와 저비용 항공사(LCC)간 경쟁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시대의 변화를 내다보고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대한항공과 차별화된 별도의 저비용 항공사 설립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이를 토대로 새로운 수요가 창출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에 따라 조 회장은 2008년 7월 진에어(Jin Air)를 창립했다. 진에어는 저비용 신규 수요를 창출, 대한민국 항공시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대한항공은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대한항공은 1969년 출범 당시 8대뿐이던 항공기는 166대로 증가했으며, 일본 3개 도시 만을 취항하던 국제선 노선은 43개국 111개 도시로 확대됐다. 국제선 여객 운항 횟수는 154배 늘었으며,  연간 수송 여객 숫자 38배, 화물 수송량은 538배 성장했다. 매출액과 자산은 각각 3500배, 4280배 증가했다. 이와 같은 도전과 역경, 성취와 도약의 역사가 담긴 대한항공의 여정에는 조 회장의 발자취가 짙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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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기업을 뛰어 넘어 대한민국 항공산업 위상 드높여

조 회장은 대한항공이라는 개별 기업을 넘어, 대한민국 항공산업의 위상 자체를 바꾸기 위한 노력도 끊임없이 이어왔다.

특히 조 회장은 ‘항공업계의 UN’이라고 불리우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맡으며 대한민국 항공산업의 발언권을 높여왔다. 조 회장은 1996년부터 IATA의 최고 정책 심의 및 의결기구인 집행위원회(BOG, Board of Governors) 위원을 맡았다. 이후 2014년부터는 31명의 집행위원 중 별도 선출된 11명으로 이뤄진 전략정책위원회(SPC, Strategy and Policy Committee) 위원도 맡아왔다.

이는 사실상 전 세계 항공산업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정책 결정에서 대한민국의 목소리가 반영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조 회장의 IATA에서의 위상은 2019년 IATA 연차총회를 사상 최초로 대한민국 서울에서 개최하는 기폭제가 됐다.

뿐만 아니라 조 회장은 대한민국 항공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도 고심했다. 2010년대 미국 항공사들과 일본 항공사들의 잇따른 조인트 벤처로 대한민국 항공산업의 중요한 수익창출 기반인 환승 경쟁력이 떨어지자, 조 회장은 델타항공과의 조인트 벤처 추진이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개장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내, 대한민국 환승 경쟁력은 다시 힘을 받기 시작했다. 이는 대한민국 항공시장의 파이를 한층 더 키우는 계기가 됐다.

◇민간 외교관으로 맹활약…대한민국의 국격 높여

조 회장은 다양한 부문에서 민간외교관으로서 활동을 하면서 국격을 높이는 데도 힘을 쏟았다.

조 회장은 한불최고경영자클럽 회장으로서 양국간 돈독한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역할을 충실히 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 훈장, 2015년에는 프랑스 최고 권위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그랑도피시에를 수훈했다.

조 회장은 몽골로부터는 2005년 외국인에게 수훈하는 최고 훈장인 ‘북극성’ 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는 조 회장이 몽골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이 컸기 때문으로 조 회장은 몽골 학생 장학제도 운영 등을 통해 한∙몽골 관계를 진정한 협력 동반자로 확대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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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조 회장은 우리나라의 국격을 높이기 위해 프랑스 루브르, 러시아 에르미타주, 영국 대영박물관 등 세계 3대 박물관에 한국어 안내 서비스를 시작했다. 조 회장이 3대 박물관에 한국어 안내 서비스를 성사시킨 것은 우리 국민이 해외에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한국도 세계적인 문화 사업에 후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국가적인 위상도 높아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국가에 대한 소명의식... 평창동계올림픽 이끌어

조 회장은 1970년 미국 유학 중 귀국해 군에 입대해, 강원도 화천 소재 육군 제 7사단 비무장지대에서 복무했다. 또한 베트남에도 파병돼 11개월 동안 퀴논에서 근무한 후 다시 강원도 비무장지대로 돌아와 1973년 7월 만기 전역까지 36개월 군 복무 후 육군 병장으로 전역했다. 이 같은 경험은 조 회장이 국가에 대한 소명의식에 대해 눈 뜨는 계기가 됐다.

조 회장의 국가에 대한 소명의식은 대한민국의 염원이었던 동계올림픽 개최로 이어졌다. 조 회장은 국가의 심부름꾼 역할을 한다는 소명 의식으로 2009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을 맡았다. 유치위원장 재임 기간인 1년 10개월간 조 회장은 50번에 걸친 해외 출장으로, 약 64만km(지구 16바퀴)를 이동했다. 그 동안 IOC 위원 110명중 100명 정도를 만나 평창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결국 이러한 조 회장의 노력은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로 이어졌다.

조 회장은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공로를 인정받아 2011년 12월 한국언론인 연합회 주최로 열린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에서 ‘최고 대상’을 수상했으며, 지난 2012년 1월에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중 첫째 등급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다.

한편 조 회장은 2014년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이라는 중책까지 맡아 지지부진하던 올림픽 준비와 관련해 경기장 및 개∙폐회식장준공 기반을 만드는 한편, 월드컵 테스트 이벤트를 성사시키는 등 평창동계올림픽을 본 궤도에 올렸다. 개최 당시에는 조직위원장이 아니었음에도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성공과 굴곡 속에서도 열정적으로 살아왔던 경영자...그럼에도 책임과 원칙은 중시

조 회장은 책임감과 소명의식을 토대로 몸을 아끼지 않고 열정을 쏟았지만, 만사가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진해운은 외부에서 영입한 전문경영인들의 잇따른 오판으로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했다. 이에 조양호 회장은 한진해운의 경영정상화를 위해 2013년부터 구원투수로 나서 1조원이 넘는 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조 회장은 한진해운을 살리기 위해 2014년 한진해운 회장직에 오르고, 2016년 자율협약 신청 이후 사재도 출연했다. 하지만 이 같은 전방위 노력은 채권단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한진해운은 2016년 법정관리에 이어 2017년 청산됐다. 육∙해∙공글로벌 물류 전문 기업의 한 축이 무너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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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에서 부당한 외압에 의해 타의로 물러난 것도 마찬가지다. 조 회장은 정부로부터 “물러나 주셔야겠다”는 사퇴 압력을 받고 2016년 5월 조직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올림픽을 위해 일하는 직원들을 걱정했다. 조 회장은 조직위에 파견된 한진그룹 직원들에게 e메일을 보내  “외부 환경에 한 치의 동요도 없이 당당하고 소신껏 행동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올해 조 회장은 대한항공 정기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 연임에 실패했다. 국민연금이 절차 논란 속에서 연임을 반대했고, 일부 시민단체에서도 연임 반대를 위해 조 회장을 흔들었다. 대한항공이 14분기 연속 영업흑자를 기록하는 등,  안정적인 영업이익을 창출하고 있는 가운데 내려진 안타까운 결과였다.

◇대한항공이라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별이 되어 하늘로 돌아가다

조 회장은 시스템 경영론으로 유명하다. 최고 경영자는 시스템을 잘 만들고 원활하게 돌아가게끔 하고 모든 사람들이 각자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율을 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 회장은 또한 절대 안전을 지상 목표로 하는 수송업에 있어 필수적 요소이고 고객과의 접점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현장임을 강조했다. 아울러 항공사의 생명은 서비스이고 최상의 서비스야말로 최고의 항공사를 평가 받는 길이라고 보고 고객중심 경영에 중점을 뒀다.

조 회장은 해외 출장의 모든 과정도 업무의 연장선이라고 여겼다. 수행하는 비서 없이 해외 출장을 다니며 서비스 현장을 돌아보고 안전에 저해되는 요소가 없는지 면밀히 살폈다. 접객 현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생생한 의견을 들어왔다.

조 회장의 모든 관심은 오로지 고객, 그리고 고객들을 위한 안전과 서비스였다. 본인을 챙길 겨를 없이 모든 것들을 회사를 위해 쏟아냈다. 조 회장의 이 같은 열정과 헌신은 대한항공이 지금껏 성취했던 것들과 궤를 같이 한다.

조 회장은 평생 가장 사랑하고 동경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하늘로 다시 돌아갔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명희(前 일우재단 이사장∙70)씨를비롯 아들 조원태(대한항공 사장∙44)씨, 딸 조현아(前 대한항공 부사장∙45)∙조현민(前 대한항공 전무∙36)씨 등 1남 2녀와 손자 5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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