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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으로 여성을 혐오하다 '산소 도둑의 일기'

등록 2019-04-14 06:10:00   최종수정 2019-04-22 10: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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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신효령 기자 = "나는 여자들에게 상처 주기를 좋아했다. 물론 육체적이 아닌 정신적으로. 나는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여자를 때린 적이 없다. 아니 딱 한 번은 있지. 하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나중에 그 얘기도 해 줄 생각이다. 문제는 내가 그들 마음을 다치게 하는 데서 성적인 흥분을 느꼈다는 사실이다. 나는 진짜로 그러는 게 즐거웠다."

익명 작가의 소설 '산소 도둑의 일기'가 번역·출간됐다. 2006년 네덜란드에서 처음 독립출판물로 출간됐다. 독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2016년 전미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다.

여성 혐오자의 내면이 일기 형식으로 담긴 작품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광고업계 아트디렉터가 화자다. 늘 술독에 빠져 살던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준 여성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열등감에 사로잡혀 여성들을 정신적으로 학대한다. 욕지거리를 하고 상처를 주면서 자존심을 세운다. 거기서 쾌락을 느끼며 자신이 피해자라고 한다. 스스로를 '산소 도둑',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공기를 허비한다고 여겨질 만큼 쓸모없는 존재라고 소개하고, 자신의 폭력·혐오를 정당화하려고 애쓴다.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를 주는 것일 뿐"이라고 항변한다.

그러던 어느날 과분한 행운이 찾아온다. 미국의 거물 기업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제대로 잘 살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면서 덥석 미국으로 떠나고 안정적인 삶이 펼쳐진다. 근사한 저택과 거액의 월급, 직업적 성공 등이 이어진다. 큰 프로젝트를 따내 뉴욕으로 출장을 간 산소도둑은 사진작가 '아슐링'을 만난다. 그녀와의 만남은 운명으로 느껴지고 일생일대의 전환점이 되지만, 예기치 못한 파국도 불러온다.

"왜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겠는가? 왜냐하면 그들이 그 일을 즐기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렇게 간단한 걸까? 영혼을 산산조각 내는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범행을 저지르는 가해자 역시 동일한 일을 겪어 보는 편이 더 좋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남에게 더 능숙하게 상처를 준다. 남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전문가들은 과연 어느 쪽을 베면 더 효과적인지 잘 알고 있다. 미처 눈치채지도 못한 사이에 날카로운 칼날이 훅 스며들고, 예리한 고통과 사과의 말이 한꺼번에 도착해 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른바 내가 친 그물로 그녀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이 나를 사랑한다고 확신하는 순간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나는 흔히들 상상하는, 화려한 벨벳의 스모킹 재킷과 보타이를 맨 무심한 플레이보이 이미지로 나를 상상했다. 나는 그들에게 상처 주는 것이 즐거웠다." 박소현 옮김, 281쪽, 1만2800원,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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