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문화일반

세계 유일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국보 됐다

등록 2020-02-20 10:41:12   최종수정 2020-03-16 10:26:44
  • 크게
  • 작게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이메일
  • 프린트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 국보 제329호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公州 忠淸監營 測雨器).(사진=문화재청 제공) 2020.2.20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박정규 기자 = 근대 이전의 강수량 측정기구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진 '금영 측우기'가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됐다. 명칭은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로 변경됐다.

문화재청은 보물 제561호 '금영 측우기'를 비롯해 조선시대 측우(測雨) 제도를 계통적으로 증명해주는 측우대인 보물 제842호 '대구 선화당 측우대'와 보물 제844호 '창덕궁 측우대'를 각각 국보로 지정했다고 20일 밝혔다.

지정명칭은 위 순서대로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로 최종 결정됐다.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가 1971년에 보물로 지정된 점을 감안하면 약 50년 만에 국보로서 가치를 인정받은 셈이다. 이들 3점은 1442년(세종 24년) 조선에서 강수량 측정을 위해 세계 최초로 측우기와 측우대를 제작한 이후 그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왔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특히 측우기의 경우 세계 기상학계에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유일하고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평가받은 바 있다.

서양에서 측우기는 1639년 이탈리아 과학자 베네데토 카스텔리에 의해 처음 언급됐지만 제작되지 못했고 이후 영국의 건축가이자 천문학자인 크리스토퍼 렌에 의해 1662년에 만들어진 것이 최초의 서양식 우량계다. 이는 우리나라보다 220년이 늦은 시기다.

이런 가운데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의 경우 1837년(헌종 3년)에 만들어져 조선시대 충남지역 감독관청이었던 공주감영에 설치된 측우기로 1911년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Nature)'지(誌)에 처음 소개돼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측우기로 보고됐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이견이 없는 상태다.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 국보 제330호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大邱 慶尙監營 測雨臺).(사진=문화재청 제공) 2020.2.20 [email protected]
1915년께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가 국외로 반출한 뒤 1971년 일본에서 환수돼 서울 기상청이 보관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중앙정부에서 측우기를 제작해 전국 감영에 보냈기 때문에 여러 점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이 측우기만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는 1자(尺) 5치(寸), 지름 7치, 무게 11근으로 오늘날 치수로 환산하면 높이 31.9㎝, 지름 14.9㎝, 무게는 6.2㎏에 해당한다. 이는 세종 대에 처음 만들어진 측우기 제도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또 바닥면의 명문을 통해 통인(通引), 급창(及唱), 사령(使令)의 직책을 가진 관리들이 관련 업무를 담당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측우기에 새겨진 이 같은 명문을 바탕으로 15세기 세종대 강우량 측정제도가 19세기까지 계승돼 원칙에 맞게 꾸준히 유지됐음을 알 수 있다.

형체 역시 운반하기 편하도록 상·중·하단 총 3개의 금속기로 구성해 미세하게 상부가 넓고 하부가 좁아 서로 끼워 맞추도록 했고 접합부는 대나무 마디처럼 만들어 기형(器形)의 변형을 막도록 하는 등 정교하게 제작됐다.

높이가 주척(周尺)을 기준으로 1자 5치(1척 5촌)의 근사치에 해당하고 각 단은 약 5치의 크기로 만들어져 몸체 자체가 강수량을 알 수 있는 척도로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기존에 빗물의 양을 조선시대 도량형 표준자인 주척을 사용해 별도로 쟀을 것으로 막연하게 추정해 온 것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는 영조 대에 새롭게 확립된 측우대 제작을 증명해주는 유물이다. 세종 때 확립된 측우기 제도는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1770년(영조 46년)에 다시 부활해 영조가 세종 당시의 제도에 따라 측우기를 제작해 팔도감영에 보내고 측우대는 세종 때의 척도를 고증한 포백척(布帛尺·조선 후기에 주로 사용한 도량형 척도)을 따라 설치하도록 했다.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 국보 제331호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昌德宮 摛文院 測雨臺).(사진=문화재청 제공) 2020.2.20 [email protected]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전후면에는 '측우대(測雨臺)'라는 표기와 함께 '건륭 경인년(1770년) 5월에 만듦(乾隆庚寅五月造)'이라는 제작시기가 새겨져 있다. 크기는 상면 길이와 폭이 36.7×37.0㎝, 높이 46㎝, 윗면 가운데 구멍은 지름이 15.5㎝다. 측우대 규격을 공식화한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증명해준다는 점에서 역사·학술면에서 가치가 크다는 게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는 1782년(정조 6년)에 제작된 것으로 측우대 제도가 정조 연간(1776∼1800년)에도 이어졌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함께 있었던 측우기는 확인되지 않지만 조선시대 강수량 제도의 역사를 설명해놓은 긴 명문과 '동궐도(東闕圖)' 등의 회화자료를 통해 창덕궁 이문원(摛文院) 앞에 놓였던 사실이 확인되며 조선 전기에 확립된 강수량 측정제도에 연원을 두고 조선 후기까지 그 전통을 지속했음이 증명된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말 이후 30일의 예고기간 동안 의견을 수렴하고 지난 13일 문화재위원회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를 열어 국보 지정 심의를 가결했다.

이들 국보 3점은 제작시기와 연원이 명확하고 농업을 위한 과학적 발명과 그 구체적인 실행을 증명해주는 유물로서 인류문화사의 관점에서도 큰 가치가 있다는 게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는 1837년에 제작됐지만 실물의 크기가 세종 대 측우기 제도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두 점의 측우대 역시 규격과 명문을 통해 그 계통을 따랐음을 보여준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세계 과학계에서도 인정한 현존 유일의 측우기와 더불어 측량의 역사를 증명하는 두 점의 측우대를 함께 국보로 지정해 우리나라 전통과학의 우수성과 그 가치를 국내외에 널리 알릴 필요성이 충분하다"고 전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이메일
  • 프린트
  • 리플
위클리뉴시스 정기구독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