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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눈물 펑펑 리시차와 베토벤 월광 소나타...'격정과 환희'

등록 2020-03-23 08:52:20   최종수정 2020-03-30 10: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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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뚫고 22일 예술의전당서 리사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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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발렌티나 리시차. (사진 = 오푸스 제공) 2020.03.22.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베토벤 '함머클라비어' 연주를 끝내기 직전부터 우크라이나 태생의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는 심상치 않았다.

22일 오후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이 곡을 끝내기 직전 울먹거리기 시작하더니, 곡 연주를 끝내자마다 울음을 펑펑 쏟으며 대기실로 급히 들어갔다. 코까지 덮이는 흰색 마스크를 쓴 상황인데도, 눈물로 뒤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이 확인됐다.
 
객석에서는 박수가 쏟아졌고, 3분가량 뒤에 밝아진 얼굴로 나온 리시차가 베토벤 소나타 14번 월광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날 공연을 기획한 오푸스는 "리시차가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 홀로 계시는 86세 노모가 갑자기 생각나서 눈물이 났다고 했다"면서 "코로나19로 인해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고 있고, 한국 청중이 모두 마스크를 착용한 채 앉아 있는데다가 '함머클라비어'가 굉장히 공감을 일으키는 곡이라 평정심을 가지고 끝까지 연주할 수 없었다고 했다"고 전달했다.

앙코르로 월광 소나타를 택한 이유에 관해서는 "리시차가 달빛처럼 사람들을 따듯하게 감싸주고 싶어서"라고 설명했다.

'격정과 환희'라는 부제에 충실한 이날 리시차는 단단한 문법을 풀어헤친 감정적 연주가 뭔지를 낱낱이 보여줬다. 베토벤 소나타 17번 '템페스트'는 감정의 고조를 유연하게 넘나 들었으며, 23번 '열정' 역시 드라마틱했다.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는 특유의 속주도 여전했다.

과거 내한공연 때도 긴 앙코르로 유명했던 리시차는 이날도 인터미션 포함 2시간30분가량을 연주했다.

앙코르만 50분이었다. 3부에 가까웠던 이날 앙코르에서는 월광을 포함해 쇼팽 녹턴 20번, 리스트 헝가리안 랩소디 2번, 라벨 밤의 가스파르, 라흐마니노프 프렐류드 op 23 no.5 등 총 5곡을 들려줬다. 커튼콜만 6, 7차례 이어졌고 객석에서는 기립 박수가 쏟아졌다. 2년 만에 내한한 리시차의 표정에는 격정이 묻어났다.

이날 공연을 끝까지 관람한 30대 회사원은 "코로나 19로 취소할까 고민도 했지만, 한국 방역을 믿는다는 말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공연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좋았다"고 말했다. 

사실 리시차의 이번 내한 결정은 쉽지 않았다. 음악 자체의 정경보다 음악을 둘러싼 풍경에 더 관심이 쏠렸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각종 내한공연이 거의 취소된 가운데 열린 무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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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발렌티나 리시차. (사진 = 오푸스 제공) 2020.03.22. [email protected]
"한국 방역 시스템을 믿는다. 한국 청중을 위로하고 응원하고 싶다"며 내한한 리시차의 결정을 클래식 음악 팬들의 상당수가 반겼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를 권고하는 한편에서는 걱정도 했다.

이날 무대는 이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사실상 유일한 공연이었다. 청중은 객석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1000명가량(기획사 자체 가집계) 됐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유튜브 등을 통한 온라인 공연이 각광 받고 있는 시점이다. 그런데 사실 리시차는 유튜브를 통해 주목 받은 클래식 스타의 선구자다. 2007년 유튜브에 올린 쇼팽 연습곡 연주로 이름을 알렸다. 그런데 오히려 유튜브 시대를 역행하는 듯한 이 오프라인 연주는 어떤 의미였을까.

최근 트위터를 자주 사용하는 리시차는 코로나 19가 확산되는 유럽의 상황을 전하며 전쟁과 같다고 걱정했다. 최근 그녀의 트윗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코로나19와 연관된 것들이다.

리시차는 내한 전 뉴시스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연예인이 아닌 음악가로서 영혼을 위한 의사라고 생각합니다. 전쟁 지역에서 연주회는 그들이 저를 정말로 필요로 함을 느꼈고, 더불어 저는 제가 인류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최근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베토벤 소나타 12번과 13번을 연주하는 영상을 최근 올려놓기도 한 리시차는 그런 마음 때문에 이번 내한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리시차는 내한 전 한국의 모바일 '자가진단 애플리케이션' 설치 관련 트윗을 남기기도 했다.

러시아 모스크바에 거주하고 있는 리시차는 귀국 비행기가 잇따라 취소돼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돌아가더라도 14일 자가 격리되는 불편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32곡) 녹음 프로젝트에 대해 집중할 수 있다며 "14일 동안 집에만 있는 것은 축복이 될 수도 있다"는 긍정을 한 그녀다.

엄혹한 시대는 음악에게 숨바꼭질을 제안한다. 온라인이라는 우회로가 있지만 안전이 보장된다면, 가끔은 절망의 자리에서 나올 필요가 있다. 예술은 해당 시대의 은유적 기록이자, 삶을 다시 재생할 수 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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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이윤청 기자 = 관람객들이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의 공연을 기다리고 있다. 공연기획사 오푸스(OPUS)는 지난 12일 "한국의 투명한 방역 시스템을 신뢰하고, 한국인들을 응원하는 의미에서 콘서트를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2020.03.22. [email protected]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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