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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억압에 대한 여성들의 록적 사자후…뮤지컬 '리지'

등록 2020-04-05 15:52:35   최종수정 2020-04-13 10: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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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뮤지컬 '리지'. (사진 = 쇼노트 제공) 2020.04.05.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최근 대학로에서 국내 초연의 막을 올린 뮤지컬 '리지'는 록(Rock) 음악이 태도와 직결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118년 전 사건을 소재로 삼고 2009년 뉴욕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작품의 라이선스지만,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여전한 우리 사회에 사자후를 강렬한 록을 통해 뿜어낸다.

1892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대저택에서 일어난 미제 살인 사건이 모티브다. 거부 보든 가(家)의 막내딸 리지가 자신의 부친과 계모를 도끼로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의심을 받지만, 재판에서 무죄를 받은 실화를 자양분 삼았다.

일상적인 공간에서 일어난 괴이한 사건을 다룬 고딕 풍의 이 사건은 이미 소설, 영화, 드라마 등 다른 장르로 숱하게 태어났다. 그럼에도 록 뮤지컬로 옮겨진 명분은 충분하다.

'리지 보든 사건'은 피상적으로 다뤄져 왔는데 앞서 영화 '리지'(2018·감독 크레이그 맥닐)가 이 사건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파고 들었다는 평을 받았다. 가부장적인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리지와 그녀의 언니 엠마는 불안으로부터 영혼이 잠식당한 채 살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뮤지컬에서는 성적 학대 정황 등을 통해 부친의 추악하고 은밀한 면을 더 드러낸다. 견고한 구조 속에서 행해진 이 억압은 동시대적 해석을 가져온다. 현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함께 우리 사회가 맞서 싸우고 있는 디지털 성착취물 제작 유통 사건의 핵심인 '지배와 폭력'을 떠올리게 한다.

지배와 폭력이 만연한 사회에서 피해자가 처한 상황에 대한 공감능력의 부재는 필연적이다. 그런 상황에서 응징은 상징적 또는 은유적으로 행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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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뮤지컬 '리지'. (사진 = 쇼노트 제공) 2020.04.05. [email protected]
도끼로 응징을 해야 하는 '리지' 속 잔혹함을 상쇄 또는 극대화할 수단으로 록 음악은 유효하다. 아직까지 세상의 조롱을 받는 여성들의 고통은 정당하게 다뤄지지 않았고, 강렬한 록 음악은 잠시나마 해방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세상에 퍼지고 있는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디지털 성착취도 끔찍한 전염병이다. 전염 정도가 약하다고, 무증상을 보인다고 침묵으로 동조한 이들 모두 암묵적인 공범자가 될 수 있다. 저항의 음악인 록은 이런 안일한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게끔 엇박자를 내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객석이 동조하게끔 만드는 추동력도 갖고 있다.

뮤지컬 한 작품에 부여하는 의미가 너무 거창한 것이 아니냐고 자칫 느낄 법도 하다. 하지만 무력감에 치를 떠는 대신 객석을 박차고 일어날 것 같은 태도로 반란을 일으킬 것 같은 에너지를 분출하는 여성 관객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는 가볍게 해석할 일이 아니다.

양주인 음악감독이 이끄는 6인조 라이브 밴드가 연주하는 넘버들은 파괴력이 어마어마하다. 특히 '메이비 섬데이(MAYBBE SOMEDAY)', '와이 아 올 디즈 헤즈 오프(WHY ARE ALL THESE HEADS OFF)?' 등의 넘버가 마음에 남는다. 대본까지 쓴 스티븐 체슬릭 드마이어와 더블 베이스 연주자 출신으로 전자 베이스까지 다룬 알랜 스티븐스 휴잇이 협업한 음악은 명곡의 향연이다.

최근 공연계에서 지금까지 다른 여성 서사를 선보여 화제작으로 등극했던 뮤지컬 '마리 퀴리'의 김태형이 이번 '리지' 라이스선스 공연의 연출을 맡았다.

무엇보다 '리지'에서 압권은 2시간을 쉴 틈 없이 몰아 붙이는 4인의 여성 캐릭터다. 대학로에서 '믿고 보는 배우'라 불리는 여덟 명의 쟁쟁한 여성 배우들이 네 배역에 각각 더블 캐스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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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뮤지컬 '리지'. (사진 = 쇼노트 제공) 2020.04.05. [email protected]
리지 역의 유리아와 나하나, 엠마 역의 김려원과 홍서영, 리지 친구 '앨리스 러셀' 역의 최수진과 제이민, 보든 가의 가정부인 '브리짓 설리반' 역에 이영미와 최현선. 이들은 재작년 공연계에 가장 큰 화제작으로 여성 배우 10명만 등장했던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의 무시무시한 기운을 록적으로 이어간다.

뮤지컬 '헤드윅'에 이츠학으로 출연한 유리아, 홍서영, 제이민, 이영미가 함께 출연하는 날은 '이츠학 데이'로 불리며 또 다른 록 마니아들을 끌어들일 태세다.

커튼콜은 '헤드윅' 커튼콜을 능가할 정도의 들끓는 에너지를 머금고 있지만, 코로나19 확산 방지의 하나로 함성을 자제해달라는 기획사 쇼노트 측의 요청으로 참고 있는 상황이다. 한 관객은 후기에 "속이 뻥 뚫렸다. 마스크 벗어던져버리고 커튼콜 한껏 즐길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이라고 썼다.

'리지'는 '스위니 토드'의 매혹적인 잔혹함, '헤드윅'의 처연한 발칙함보다 좀 더 화끈한 에너지, '베르나르다 알바'의 연대가 고루 섞인 작품이다. 코로나19 종식과 함께 그 에너지는 더 크게 분출할 것으로 보인다. 6월21일까지 드림아트센터 1관 에스비타운.

한편, 공연제작사 쇼노트는 코로나 19 확산 방지를 위해 관람 시 마스크 착용 의무화, 열화상 카메라 설치 및 전 관객 대상 체온 측정, 전 관객 대상 코로나 19 관련 자가 문진표 및 개인 정보 활용 동의서 작성, 해외 방문객 입장 불가, 입장 전 손 세정제 착용 등을 지켜나가고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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