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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수출 규제 1년]해법 없이 평행선…WTO 제소로 갈등 장기화 불가피

등록 2020-07-01 06:00:00   최종수정 2020-07-06 09:3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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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WTO 재판 1~2년 소요…한일, 연말 본격 격돌 전망

양국 패널심리에서 '가트' 해석 두고 주장 엇갈릴 듯

법적 논리 뒷받침할 국내 산업 피해 등 증거 제시 필요

'강제징용 문제' 변수로 떠오를 가능성…"주장 보완해야"

WTO 상소기구 마비는 고려 단계 아냐…MPIA도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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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뉴시스] 이승재 기자 = 한국과 일본의 무역 갈등이 1년째 이어지고 있다. 의미 있는 대화조차 몇 차례 해보지 못한 채 양쪽의 주장은 평행선을 달리는 중이다.

지난해 7월 일본 정부는 반도체 핵심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수출 심사를 까다롭게 보겠다고 통보했다. 겉으로는 무기 제작에 쓰일 수 있는 전략물자 수입국으로서 우리나라를 신뢰할 수 없다는 논리를 댔지만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와 대법원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경제보복 조치와 다름없다.

이에 우리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카드를 꺼내 들었다. 지난해 말 일본 정부가 대화에 응하면서 제소 절차를 잠시 멈추기도 했지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재판으로 넘겨버렸다.

통상 WTO 재판에는 1~2년이 소요된다. 결과에 불복해 상소기구로 사건이 올라가면 최종 결과는 더 늦게 나온다. 앞서 우리나라가 승소한 한·일 양국 간 후쿠시마 수산물 분쟁 소송도 총 4년이 소요됐다.

장기전은 불가피하다. 단순히 수출관리 제도에 대한 보완만으로 일본 조치가 원상회복되기는 힘들 수도 있다. 갈등의 발단인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양국의 입장차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WTO 제소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현재 WTO 상소기구는 사실상 기능을 잃은 상태다. 그래서 국제 사회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상징성에 무게를 두고 지켜봐야 한다는 견해도 나온다.

◇논의는 원점…이르면 연말 1심 진행

1일 산업통상자원부 등에 따르면 이달 29일 열리는 WTO 분쟁해결기구(DSB) 회의에서 패널 설치가 완료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산업부는 WTO 사무국과 주제네바 일본대표부에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 불화 폴리이미드, 불화수소 등 3개 품목의 수출규제 조치 건에 대한 패널 설치 요청서를 발송한 바 있다.

직후 열린 DSB 회의에서는 일본 측의 반대로 패널이 설치되지 않았다. 제소국이 패널 설치를 요청한 이후 처음 열리는 회의에서 피소국은 패널 설치를 거부할 수 있다.

두 번째 회의에서는 피소국에 이와 같은 권한이 없다. 회의에 참여한 모든 나라가 패널을 설치하지 않기로 합의하지 않는 한 자동으로 패널위원 구성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패널위원은 쉽게 말하면 법관이다. 흔히 패널 심리는 WTO 분쟁 해결 절차의 1심 격으로 불리기도 한다. 패널은 상설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분쟁마다 패널위원을 정하게 된다. 원칙적으로는 3명을 선정하고 당사국 간 합의가 있으면 5명이 될 수도 있다. 이 패널위원 구성에도 2~3개월이 걸린다.

패널심리는 분쟁당사국과 제3국이 참여하며 6개월가량 진행된다. 이 기간은 최대 9개월까지 늘어날 수 있고 긴급한 사안은 3개월 내 심리가 끝난다.

패널심리에 들어가면 제소국이 먼저 변론서를 제출한다. 이후 피소국은 이를 반박하기 위한 변론서를 내는 데 이런 과정이 한 차례 더 이뤄지고 나서야 구두 변론이 진행된다.

심리가 끝나면 분쟁 당사국은 패널보고서를 제출한다. 양국이 패널보고서에 찬성하면 DSB에서 해당 보고서를 채택하고 재판 절차는 마무리된다. 이후 패소국은 DSB 권고·결정에 대한 이행계획을 보고하게 된다. 만약, 패소국이 결과에 불복하면 사건은 상소기구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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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뉴시스]강종민 기자 = 나승식 산업통상자원부 무역투자실장이 지난달 2일 오후 정부세종청사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한 세계무역기구(WTO) 분쟁해결 절차 재개 브리핑을 위해 단상에 오르고 있다. 2020.06.02. [email protected]


◇'가트'로 日 수출규제 부당성 입증

양국 간 패널심리는 올해 말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패널심리가 진행되면 양국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가트)에 대한 해석을 두고 엇갈린 주장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앞서 WTO에 제출한 우리나라의 협의요청서를 보면 정부는 가트와 무역원활화협정(TFA), 무역관련투자조치협정(TRIMS), 지식재산권협정(TRIPS), 서비스무역협정(GATS) 등을 인용해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가 WTO 협정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당시 정부는 가트 1조(최혜국 대우), 10조(무역규칙 공표 및 시행), 11조(수량제한의 일반적 폐지) 조항 위반에 대한 근거 자료를 제시한 바 있다.

최혜국 대우 의무는 같은 상품을 수출입 하는 과정에서 WTO 회원국들 사이에 차별을 둬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다.

앞서 일본 정부는 한국에 특혜를 부여했다가 보통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기 때문에 최혜국 대우 의무 위반이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래도 예외 사유가 존재하지 않는 한 특혜를 취소하는 조치도 원칙적으로 최혜국 대우 의무 적용대상이라고 볼 수 있다.

정부는 가트 11조 1항을 근거로 3개 품목에 대한 수출제한 조치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조항에는 WTO 회원국은 수출에 대해 금지 또는 수량제한 조치를 취할 수 없다고 명시돼있다.

일본이 해당 품목에 대해 한국만을 특정해 포괄허가에서 개별허가로 전환했기 때문에 WTO의 근본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가트 10조 3항 위반 가능성도 있다. 일본이 유사한 상황에 놓여 있는 이해관계자를 일관되게 대우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여기서는 WTO 회원국이 모든 법률과 규칙, 판결 및 결정을 공평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실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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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신화/뉴시스]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세계무역기구(WTO) 본부의 모습. 2018.04.12.


◇'WTO 한일전' 변수는 결국 강제징용 문제

전문가들은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문제가 이번 패널심리에서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한다. WTO는 통상 분쟁을 관장하는 기구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판결을 내줄 수는 없다. 따라서 주요 쟁점 사안에서 우리 측 의견을 뒷받침할 증거로 이 문제가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즉,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가 순수한 국가 안보 목적에서 이뤄진 조치가 아니라는 우리 정부의 주장을 강제징용 문제를 통해 보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을 통해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문제가 이미 해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반대로 대법원은 청구권협정으로 피해자 개인이 일본 기업에 배상을 청구할 권리마저 사라진 것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고 우리 정부도 이 결정을 존중하고 있다.

이천기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강제징용 문제가 법적인 청구에 대한 심리로는 논의가 되지 않더라도 증거 가운데 하나로 패널심리에서 논의될 것"이라며 "정부 입장에서는 일본 수출규제가 강제징용과 관련된 대법원 판결의 후속 조치로 이뤄졌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법적인 논리도 중요하지만 각 청구(클레임)에 대한 증거를 어느 정도 확보했느냐에 따라 패널심리 전개 방향도 정해질 것"이라며 "1심 단계에서 이번 조치로 인해 국내 산업에 피해가 있었다는 증거를 충분히 제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WTO 상소기구 기능이 마비된 상태이지만 지금 이를 걱정하기는 이르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른바 '부자 나라'인 중국 등이 개발도상국 특혜를 받고 있지만 WTO에서 이를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며 비판해왔다.

실제로 미국은 WTO의 분쟁 해결 최종심을 담당할 위원들의 선임에 지속적으로 반대해왔다. 이 때문에 WTO는 지난해 말부터 상소기구 운영이 사실상 중지되면서 분쟁해결 기능을 상실한 상황이다.

상소기구 대안으로 '다자간 임시상소중재약정'(MPIA)이 주목받고 있다. MPIA는 상소기구 기능이 회복되기 전까지 임시로 MPIA 참여 회원국 간 분쟁을 중재하는 제도다.

현재 유럽연합(EU), 중국, 호주, 캐나다, 멕시코를 포함한 21개 회원국이 참여했고 한국과 일본은 가입하지 않았다.

이 부연구위원은 "동향을 봐서 우리나라도 MPIA 참여를 고려해볼 여지가 있다"며 "무엇보다 일본 제소 건에 대해서는 상소기구를 걱정할 단계는 아니다. 패널심리에 집중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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