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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종 문화소통]세종이 초성 자모를 중국과 달리 새로 정한 까닭

등록 2020-10-28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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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종의 ‘문화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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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세종어제 자모명칭 시가(世宗御製字母名稱詩歌)(해석: 박대종).
[서울=뉴시스]  훈민정음 28자는 초성 17개와 중성 11개로 이루어져 있다. 종성은 초성을 다시 쓰기 때문에 훈민정음의 총수에 합산하지 않는다.

초성의 경우 긴소리인 전탁(全濁) ‘ㄲㄸㅃㅉㅆㆅ’의 6개자를 합하면 17+6=23자가 된다. 이른바 동국정운 서문에서 말하는 ‘23母’다. ‘초성(初聲)’은 세종의 작명이고, 중국 전통 음운학에선 ‘성모(聲母)’라 불렀다. 중국 음운학에선 한자의 음 중 처음 시작하는 소리를 ‘성모’, 그 나머지 음을 통틀어 ‘운모(韻母)’라 불렀다.

그렇다면 중국 전통 음운학에서 말하는 ‘자모(字母)’란 무엇인가?

‘자모’를 ‘성모’와 구별 없이 같은 말로 보는 경우가 있지만, 엄밀히 말해 ‘자모’는 ‘성모의 대표 글자’를 뜻한다.

‘ㄱ’ 초성을 예로 들면, ‘ㄱ’은 성모이며 ‘見(견)’은 자모이다. ‘ㄱ’ 초성의 글자들은 매우 많다. ‘加(더할 가)’, ‘歌(노래 가)’, ‘脚(다리 각)’, ‘干(방패 간)’, ‘艱(어려울 간)’, ‘葛(칡 갈)’, ‘甘(달 감)’, ‘江(강 강)’, ‘君(임금 군)’, ‘改(고칠 개)’, ‘車(수레 거)’, ‘建(세울 건)’, ‘見(볼 견)’, ‘京(서울 경)’ 등 많은 글자들의 초성이 ‘ㄱ’으로 같다.

중국에선 당나라 말엽 승려 수온(守温)이 전해 내려오는 사항들과 범어 자모에서 힌트를 얻어 30개의 성모를 발견하고 그에 대한 자모를 정했다. 수온의 30자모는 송나라 때 36자모로 확대됐다가, 명나라 홍무정운에서는 31자모로 조정됐으나, 중복되는 성모의 자모(대표글자)는 변함없이 존중됐다. 예를 들어, ㄱ 소리의 대표글자는 수온의 30자모 이래 후대의 운서에서도 계속 ‘見’으로 나타냈다.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한자음의 성모, 곧 초성이 중국과는 달리 23모임을 파악했다. 우리나라 말소리 중 토속어의 경우 된소리 초성도 있으니 그것까지 합하면 성모의 숫자는 크게 늘어난다. 하지만 한자음에는 조선과 명나라 모두 된소리 초성이 없어, 된소리 초성의 수는 훈민정음의 수에 합산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각자병서와 합용병서의 두 글자 또는 세 글자 병서는 훈민정음 28자에 합산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종은 중국의 초성과 우리나라의 초성이 상당수 같음을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표글자를 정할 때 중국 전통 음운학에서 정한 자모를 따르지 않고 새로 지었다. 예를 들어, <사진>의 ‘세종어제 자모명칭 시가’에서 보듯, 중국 음운학에서 ㄱ 소리에 대해 ‘見’이라 한 것을 따르지 않고 ‘君(군)’이라 하였다. 왜 그랬을까?

세종께서 중국과 조선의 말소리를 연구해본 결과, 7음 중 ‘치음(齒音)’의 경우는 두 나라의 소리가 서로 매우 달랐다. 중국 명나라의 치음은 ‘치두(齒頭)와 정치(正齒)’ 소리로 2분됐다. 2019년 4월9일자 <훈민정음 치두·정치음, 중국은 지금도 발음> 편에서 밝힌 것처럼, 오늘날 중국에선 ‘치두’ 소리를 ‘설치음(舌齒音: z, c, s)’이라 부르고, ‘정치음’은 ‘권설음(卷舌音)’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치음은 이들과는 다른 종류의 잇소리였다. 그래서 중국에서 정한 치음 자모를 따를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치음 ‘ㅈㅉㅊㅅㅆ’에 대한 자모를 ‘即慈侵戌邪(즉짜침슐쌰)’라고 새로 정할 수밖에 없는, 중국과는 통일 불가의 상황이었다.

또한 7음 중 ‘설음(舌音)’ 또한 중국은 ‘설두(舌頭)’와 ‘설상(舌上)’으로 이분됐으나,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순음(脣音)’도 중국은 ‘순중(脣重)’과 ‘순경(脣輕)’으로 이분됐으나, 우리의 한자음엔 순경음 초성은 없었다.

이러한 사항들을 파악한 세종께서는 중국과는 이질적 성격의 우리나라 치음 초성에 대한 자모를 새로 지은 것을 확대하여, 내친 김에 7음 초성 전체 곧 ‘23성모’ 모두에 대한 대표글자를 중국과는 달리 새로이 정했다. 그것을 연산군 이후 중종 때 최세진이 ‘훈몽자회’에서 훈민정음 23모를 제멋대로 16모로 줄이고 그 초성 자모 또한 새로이 ‘기니디리…’로 변경했다. 오늘날 후손들은 세종이 정한 초성명칭이 있는 줄은 전혀 모른다. 오직 최세진이 정한 자모명에만 세뇌돼 있을 따름이다.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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