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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종 문화소통]세종대왕은 신미를 1450년에 처음 만났다

등록 2020-11-11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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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종의 ‘문화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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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김수온이 세조의 명을 받아 1464년 작성한 ‘복천사기(福泉寺記)’에는 세종대왕이 신미의 이름을 듣고 처음 만난 해는 ‘경오(1450)년’이라 쓰여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일치한다. 이는 복천사기는 신미가 훈민정음 창제와는 전혀 무관함을 입증한다.
[서울=뉴시스]  훈민정음의 창제자를 세종대왕이 아닌 신미로 왜곡한 영화 ‘나랏말싸미’가 2019년 7월24일 개봉한 지 1년이 넘게 지났다.

1450년 음력 4월6일자 조선왕조실록의 “세종대왕께서 병인년(1446)부터 비로소 신미의 이름을 들었고, 금년(1450)에는 효령대군의 사제로 옮겨 거처해 정근할 때 불러 보시고 우대한 것은 경들이 아는 바이다”란 기록은 1444년 양력 1월경 창제 완료된 훈민정음 작업에 신미가 끼어들 조금의 틈도 허용치 않는다.

영화 개봉 며칠 뒤 7월29일 조철현 감독은 언론사에 보낸 장문의 글에서 “실존 인물 신미는 세종대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입니다. 신미의 동생이자 집현전 학사이기도 했던 김수온의 문집 ‘식우기’ 중 ‘복천사기’에 세종대왕께서 신미를 산속 절로부터 불러내 긴밀한 대화를 나눴다는 기록이 있고”라고 하였다. 해당 영화를 정당화하는 증거로 ‘복천사기’를 내놓은 것인데, 세종과 신미가 만난 날짜는 언급하지 않았다.

국립국어원의 2019년 한글날 특별호 ‘다시 보는 한글: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의 글에서 ‘세종·신미 합작설’을 주장한 ‘정광’ 교수 또한 비슷한 말을 했다.

“신미대사를 세종에게 추천한 것은 효령대군이다. 속리산 복천사에 우거하면서 범자와 성명기론에 정통한 것으로 이름을 날리던 신미를 세종이 수양대군을 보내어 불러 효령대군의 집에서 만난다. 그때는 최만리의 반대 상소로 인하여 세종이 새 문자 제정을 전면적으로 다시 검토할 때였다. 세종과 신미의 만남에 대하여는 신미의 동생인 김수온(金守溫)의『식우집(拭疣集)』(권2)『복천사기』에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국어를 전공한 전문 연구자로서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 기존과는 다른 학설 또는 의견을 내놓을 수는 있다. 그러나 날짜를 속이는 행위는 매우 곤란하다. <사진>에서 보듯, 공조판서 김수온이 세조의 명을 받아 1464년 음력 2월말에 쓴 ‘복천사기’에는 세종과 신미가 처음으로 만난 연도와 정황이 명확히 기재돼 있다.

“경오(庚午: 1450)년에, 세종대왕께서 몸이 편치 않아 효령대군의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문종 및 우리 주상전하(세조)가 곁에서 모시며 의약과 신께 제사를 올렸으나 아직 효험을 얻지 못했다. 이에 청정한 승려들을 불러 모아 지성으로 정근(精勤)한 바, 과연 영묘한 감응을 얻게 되었다. 임금의 몸이 비로소 편안해지자 여러 종친들이 다투어 금과 비단을 내놓아 아미타불, 관음불, 대세지보살의 세 불상을 조성하였다. 혜각존자 신미공이 이곳 복천사에 와서 돌보니 진실로 명승지가 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세종대왕께서 존자의 명성을 듣고는 산으로부터 불러들여 자리를 내주고 조용히 대화해보니, 말하는 것이 신속하고 예리하며 의리가 정밀하고 막힘이 없어, 물음에 대답하여 아뢰는 것이 임금의 뜻에 맞은 바, 이로부터 세종의 총애와 대우가 날로 두터워졌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1450(경오)년 음력 1월22일 몸이 편치 못하여 흥인문 밖 효령대군 집으로 이어했고, 신미를 불러들여 침실 안에서 첫 대면한 날짜는 음력 1월26일이다. 세종은 그로부터 49일 후인 2월17일 영응대군 집 동별궁에서 승하하였다.

이처럼 세종과 신미가 첫 대면한 연도가 1450년이란 증언은 조선왕조실록과 김수온의 복천사기가 서로 일치한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1444년 양력 1월에 완료됐고, 같은 해 양력 3월5일 세종은 최항 등에게 언문으로써 ‘운회(韻會)’를 번역하라고 명한다. 그리고 세종이 최만리 등의 고언을 받아들여 보다 신중을 기한 끝에 해례본을 완성시킨 것은 1446년 음력 9월이다.

고로 복천사기는 훈민정음 28자 창제와 신미는 전혀 무관하다는 증거자료일 뿐이다. 날짜를 말하지 않은 채 복천사기를 신미의 훈민정음 창제 증거인 것처럼 현혹시킨 것은 세종대왕은 물론이거니와 혜각존자라는 칭호를 받은 신미와 불교계에도 누를 끼치는 일이다.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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