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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언의 책과 사람들]김광식과 '신래현의 조선향토전설집'

등록 2021-01-31 10:14:05   최종수정 2021-02-01 10: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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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향토전설집(사진=한상언 제공)2021.01.26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71년 일본의 태평출판사는 '조선의 신화와 전설(朝鮮の神話と伝説)'의 재발간을 추진한다.

이 책은 1943년 동경 히토츠기서점(一杉書店)에서 발행한 신래현의 저서였다. 태평출판사 최용덕 사장은 저자인 신래현에게 출간을 승낙받기 위해 그의 행방을 찾았다.

 초판 발간 당시 와세다대학 연극박물관장이던 가와타케 시게토시(河竹繁俊)와 경성제국대학 교수인 아키바 다카시(秋葉隆)의 글을 서문에 실은 것으로 보아 관련 학자들을 통한다면 신래현의 행적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최사장의 생각은 어긋났다. 관련 분야 학자들을 통해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보았으나 신래현의 근황을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기에 우선 책부터 발간하기로 했다.

그 후의 일은 저자를 찾은 후에 진행해도 된다는 판단이었다. 결국 독자들에게 저자의 소식을 알면 꼭 출판사로 연락해 달라는 부탁의 말을 '간행자의 후기'에 싣고 책을 출간했다.

근 30년 만에 다시 나온 '조선의 신화와 전설'에 대한 독자의 반응은 괜찮았다. 1975년까지 9쇄를 찍었고 1981년에는 개정판이 나왔다.

책은 일본 전역은 물론 해외에까지 소개되었다. 하지만 1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신래현에 대한 새로운 정보는 어디서도 얻을 수 없었다.

1986년 7월, 평양의 인민대학습당에서 일본어 서적을 검토하던 신래현은 일본에서 발행된 자신의 책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책을 펼쳐 읽던 중 간행자의 후기에 자신의 근황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연락을 해달라는 당부의 글을 발견했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일본에서 책을 내던 시절이 어제 일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40년도 넘은 이제는 옛날 이야기였다. 그 옛날 무명의 조선청년이 책을 낼 수 있게 도움을 준 초판의 발행인 히토츠기 아키라(一杉章) 선생의 근황이 궁금했다.

집에 돌아와 일본의 태평출판사로 편지를 썼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서울에서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전쟁 이후 북한에서 살게 되었다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써내려갔다. 편지지 3장에 까만 글씨가 빼곡히 채워졌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얼마 후 태평출판사로 신래현이 보낸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를 집어든 최사장은 심장이 뛰었다. 조심스레 편지를 꺼내 읽었다. 신래현은 조선과학원에서 전설과 설화에 관한 연구를 하다가 지금은 금성청년출판사에서 젊은이들을 위한 사전편찬사업에 종사한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면서 이번 서신교환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의 학자들이 함께 민화와 전설을 연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도 했다. 신래현이 평양에서 보낸 편지의 내용은 1986년 8월 19일자 동경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에 보도되었다.

전쟁 후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말하는 인민성을 담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민족문화의 계승발전을 중요한 과업으로 삼았다.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조선의 신화와 전설'을 출간한 바 있던 신래현은 우리말로 간행된 최초의 전설집인 이홍기의 '조선전설집'(조선출판사, 1944)을 참고하여 1957년 평양의 국립출판사에서 '향토전설집'을 발간했다.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민속학자 김광식은 일본어로 발행된 조선설화집들을 검토하던 중 '조선의 신화와 전설'의 저자 신래현이 한국전쟁 중 북한으로 갔고 그곳에서 '향토전설집'을 발행했음을 알아냈다.

북한에서 발행한 '향토전설집'을 확인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아카이브를 뒤졌지만 어느 곳에서도 이 책을 소장하고 있지 않았다.

 2013년 일본인 지인을 통해 우리의 국립중앙도서관과 같은 평양 인민대학습당의 자료를 찾아 볼 수 있었던 그는 '향토전설집' 총 275면 중 182면 이후의 내용이 삭제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남한지역의 전설들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아쉽지만 확인 가능한 부분들을 토대로 2016년 근대서지학회 학술대회에서 "'신래현과 '향토전설집'"이란 주제로 발표했다. 월북 이후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신래현의 재발견이었다.

책을 수집하는 입장에서 내가 가진 책이 다른 이들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면 그것만큼 뿌듯한 것이 없을 것이다. 김광식 선생이 '근대서지' 14호(2016)에 실었던 "신래현과 '조선향토전설'"이라는 글을 읽은 후 우연한 기회에 온전한 '향토전설집'을 수집하게 되었다.

이후 그 사본을 근대서지학회 회장인 오영식 선생을 통해 김광식 선생에게 전달했고 이를 토대로 '신래현의 조선 향토전설집'(소명출판, 2020)이라는 책이 세상에 나왔다. 국경을 초월하여 북한과 일본의 학자들이 함께 연구할 수 있기를 꿈꿨던 신래현의 바람은 김광식 선생의 노력으로 작은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서울에서 발간된 신래현의 책을 보며 인민대학습당의 서가에서 재발행된 자신의 책을 발견했을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언젠가 남북한과 해외의 민속학, 국문학 연구자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신래현과 신래현이 남긴 저작들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 할 그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한상언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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