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 > 연예일반

[한상언의 책과 사람들]계엄에 짓밟힌 출판의 자유

등록 2021-04-21 13:26:14   최종수정 2021-04-21 13:26:14
  • 크게
  • 작게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이메일
  • 프린트

'한국영화계 산증인' 김종원 선생의 기록

'이 시대에 부는 바람'·'바보와 등신' 비화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김종원 영화평론가가 작성했던 확약서(사진=한상언 제공)2021.04.21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1937년에 제주에서 태어난 김종원 선생은 1959년 시인으로 등단 후 지금까지 영화평론가, 잡지편집인, 기자, 영화기획자, 영화사연구자로 활약하고 있는 한국영화계의 산증인이다.

특히 1965년 발족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의 10명의 발기인 중 한 명이며 1981년 영화평론가협회 회장직을 지낸 영화계 원로이면서도 지금도 여러 지면에 글을 발표하는 현역 최고령 평론가이기도 하다.

선생의 글을 읽으며 날카로운 비평의식으로 무장한 선생의 글이 일반 독자는 물론 동료 영화평론가들과 영화사연구자들에게까지 귀감이 될 만큼 독보적이었다는 점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문장이 깔끔하고 치밀하며 리듬감도 가지고 있어 읽기에 부담이 없다. 한국영화사 관련 글은 꼼꼼한 자료검토와 분석에 바탕한 실증적인 글쓰기의 모범과도 같다.

선생은 중학시절 한국전쟁 당시 제주로 피난 온 소설가 계용묵 선생으로부터 문장쓰기에 대한 기본을 익혔고 오랫동안 시인으로 활동한 경력이 바탕이 되어 남들과 차별된 아름다운 글을 쓰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1980~1990년대 그의 영화평이 실리지 않는 지면이 없을 정도로 선생의 글은 인기가 많았다. 이뿐만 아니라 영화평론가의 역할을 대중에 알리기 위해 텔레비전 방송도 마다하지 않고 출연하여 대중들에게까지 친숙한 영화평론가였다.

2019년 12월부터 2020년 2월까지 3개월 동안 나는 11차례에 걸쳐 선생을 인터뷰했다. 이 인터뷰 자료를 기본으로 관련기록들을 찾아 빈틈을 메우고 부족한 부분은 추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선생의 생애를 세밀히 기록하는 중이다.

사실 코로나19로 인해 인터뷰 이후 한 해 정도를 쉬었다. 그러다가 2021년 2월부터 2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매일 선생의 말을 글로 풀어 브런치(https://brunch.co.kr/@sangeonhan/)에 옮겨 적고 있다. 현재 100회 정도의 기록이 쌓여 책으로 묶을 수 있을 만큼의 두툼하고 꽤 괜찮은 원고가 만들어졌다.

참고로 선생이 풀어놓은 기록은 제주 4·3에서부터 자유당 말기 영화계의 상황,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1950-60년대 영화잡지들에 관한 이야기, 선생이 근무했던 1960년대 최대 출판사인 학원사와 조선일보사에 관한 흥미 있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기억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촘촘한 개인사의 복원이 가능한 이유는 선생의 꼼꼼한 성격과 그로 인해 기록하고 수집해 놓은 귀중한 자료 덕분이다. 매일 원고지 10~15매 분량의 글을 정리해 브런치에 올리면 선생께서 그 내용을 꼼꼼하게 검토 후에 잘못된 부분을 정정하고 미진한 부분에 대해서는 보충해 준다. 자연스럽게 추가 인터뷰 자리에서 1차 인터뷰에서 빠졌거나 설명이 부족했던 것들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을 만나게 된다.

그 중 하나는 1979년 말에서 1980년 초 사이 일명 '서울의 봄'과 관련한 출판계의 중요 사건들과 관련한 자료이다. 바로 계엄사에 의해 판매 금지된 책들을 회수하라는 명령에 따라 이러한 지시를 성실히 지키겠다는 출판사의 확약서가 그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계엄사령부에서는 이미 출간된 책들에 대한 검열을 다시 시작했다. 이 무렵 선생께서 편집주간으로 근무하고 있던 태창문화사에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소속의 이호철 작가가 고문으로 있으면서 재야인사들의 책을 여럿 발간했다.

계엄사령부에서는 태창문화사에 압력을 넣어 이미 발간한 서적 중 함석헌, 문동환, 이문영, 한완상, 함세웅 등 종교인들이 참여한 수필집 '이 시대에 부는 바람'과 해직 언론인 송건호를 비롯해 안병욱, 한승헌 등이 참여한 '바보와 등신'을 회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주간으로 있던 선생이 계엄사령부의 명령에 따르겠다는 확약서를 직접 작성해 제출하고 그 사본을 남겨 지금껏 보관했다.

이 무렵 태창문화사에서는 정치활동을 재개한 김대중의 자서전을 출간하기로 하고 원고의 일부를 받아 조판까지 마쳤다. 그러나 서울의 봄이 광주의 유혈 진압으로 막을 내리게 되면서 인쇄를 앞둔 조판을 급하게 헐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비화 중의 비화이다.

조선일보 해직기자 출신으로 운신의 폭이 넓지 않았을 그가 후대의 역사를 위해 확약서 사본을 지금껏 소중하게 보관했다는 것이야 말로 사료를 중시하는 역사가의 중요한 자세라 말할 수 있다. 계엄사령부에 보낸 확약서의 사본을 보면서 그때 선생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다시금 생각해 본다.

▲한상언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이메일
  • 프린트
  • 리플
위클리뉴시스 정기구독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