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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 아트클럽]'시대의 반항아' 이건용 단색화 지운다

등록 2019-06-04 15:18:15   최종수정 2019-06-17 09:5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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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행위미술 1세대 대표 작가...40여년만 재조명 활발

캔버스 뒤에서 거꾸로 그리고 양팔로 그린 '하트 그림' 인기

"난 그리지 않는다...예술 매체 가장 중요한 것은 신체"

페이스 갤러리서 베이징 이어 서울서 두번째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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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현주 미술전문기자= 국내에서 처음으로 행위예술을 선보인 개념미술 1세대 대표작가 이건용. 그가 캔버스 앞에서 서서 손을 뒤로 뻗어 그려낸 '거꾸로 그림'이 40여년만에 재조명되며 인기를 얻고 있다.


【서울=뉴시스】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캔버스 앞에 서 뒤로 팔을 길게 뻗는다. 팔이 닿는 만큼 그리고, 또 그린다. 옆으로 위로 옆으로 옆으로 아래로 아래로...온 몸을 고정한채 양 팔만 이용해서 그릴수 있는 만큼 선을 그려낸다. 얼굴은 찡그려지고, 꽁꽁 묶인 몸이 움직이는 것 처럼 우스꽝스럽던 행동은 '나비효과'의 시작이 됐다.

1976년 시도했던 일명 '거꾸로 그림'이 날개를 달았다. 한 사람의 에너지가 분출하는 듯한 이미지로 재현됐지만 그림이 아니다. "자기 몸이 그은 흔적"이다.

또 있다. 이번엔 캔버스 앞이다. 여러 물감이 섞인 붓을 들고 양팔을 모아 허공에 휘두르면 거대한 '하트 모양'이 생겨난다. 빛의 속도로 행해진 양팔의 움직임에 정신없이 섞인 물감이 강렬하게 모습을 발산하지만, 이 또한 그림은 아니다.

국내 행위미술 1세대 대표작가 이건용(77)은 "인체에서 아름다운 선이 나왔을 뿐이다"고 했다.

 그 몸의 흔적, 선이 만든 그림이 미술계를 강타하고 있다. '바야흐로 국내 미술계는 이건용 시대'라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단색화를 대체한다'는 분위기다.

 실제로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40여년전 그가 행했던 퍼포먼스, 즉 그의 '신체 드로잉'이 강렬하게 꿈틀대고 있다. 지난 3월 열린 세계적인 아트페어인 아트바젤 홍콩과 미술품 경매사 서울옥션, 필립스 경매사등에서 작품이 나오기 무섭게 팔려나가고 있다. 양 팔을 크게 휘둘러 하트 모양을 그린 ‘드로잉의 방법 76-3-2010’은 추정가를 웃도는 약 1억4000만원에 낙찰되면서 아트페어 부스마다 '이건용' 작품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최근 하트 모양이 인기라면서 밑에까지 굵게 그려달라고 주문하는 컬렉터까지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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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현주 미술전문기자= 서울 이태원 페이스 갤러리에서 행위 예술가 이건용이 양손으로 그려낸 작품앞에서 그림을 그릴때 취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건용도 스스로 놀랍다. 세상이 변했다. '하트 모양', 추상화같은 '신체 드로잉'은 저항의 산물이다.

  “1970년대 사회 체제와 당대 권력이 모든 담론을 장악하던 시대에, 신체가 허용한 범위 내에서만 그리겠다는 것은 보지 못하고 판단하지 못했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 시대는 통제시스템에 의해서 압축 성장하는 시기였다. 권력이 끌고 가는 시대에 전복하고 거부하는 예술의 수단으로 신체드로잉을 선택했던거다"

1970년대 그가 온 몸으로 발언한 '행위 미술'은 '불온 미술'이었다. 군사정권 시대, 젊은 작가들을 억압했고 그도 '불온한 인물'로 낙인찍혔다. 체제 억압적인 시대에서 그가 거꾸로, 또는 지워가며 ‘그리다’라는 행위는 정부에 대한 도발이었다.

"나는 당시 온건했지만 당대의 정부 기관은 눈치가 빨랐다. 나를 불러다가 테러도 했고, 구두발로 무릎을 밟아 10년간 고생을 했다."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 그룹 ST(Space and Time)의 창립자이자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의 선구자인 이건용은 70년대 스타 작가였다. 전통적인 회화의 방법론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와 실험을 통한 조형적 해체를 추구하며 한국 현대사회의 기성문화를 비판했다. 1973년 파리비엔날레, 1979년 상파울로비엔날레에 참가한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이건용 덕분에 한국 행위미술이 역사를 만들었다. 1975년 발표한 '동일면적'과 '실내측정'을 시작으로, 197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약 5년여에 걸쳐 40개가 넘는 행위미술 작품을 발표했다. 이는 당시의 그 어떤 작가보다 월등히 많은 수의 행위미술 작품을 발표한 것이었고, 동시에 한국 행위미술의 지지부진한 전개를 일순간에 전환∙정착∙확장시킨 것이었다. 이건용의 행위예술은 '논리적 이벤트'라고 명명되며 한국 행위예술 발전의 모태가 됐다.

그의 반골 기질은 여전하다. "말하자면, 그런 현상학이 나타나게 된 것은 형이상학적이고 관념론적인 철학에 반기를 들면서다. 이 세계를 사는 주체가, 세계를 어떻게 만나는가 하는 문제에서 '지각'이라는 말을 끄집어낼수 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현상학과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언어학에 푹 빠졌다. 넘버링으로 되어 있는 그의 작품 제목은 비트겐슈타인의 오마주다. (작품 제목을 구분하자면, 76-2는 뒤로 놓고 그림, 76-3은 하트모양의 작품이 제목으로 제작년도와 함께 이어지고 있다.)

단순한 작품으로 보이지만 연구가 낳은 분석적인 결과다.(중학교때부터 프랑스 독일문화원등 해외 문화원을 찾아다니며 미술자료를 섭렵했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를 구사하는 것과 명제를 만드는 것은 경험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사실로 그려낼수 있는가 초점을 맞추고 연구한 것이다. 그 사람의 철학 논고를 보면, 넘바링을 붙여서 큰 넘버에 다시 넘버를 붙여 글을 써나간다. 나는 그걸 고등학교때 봤다."

목사였던 아버지 영향도 있다. "당시 아버지 서재에는 책이 1만여권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딱 한번 이사할 정도였다.  비트겐슈타인에 빠진 나는 어느 대학교에서 언어학회가 열리면 (고등)학교를 결석하고 그 학회에 갔다. 어른처럼 보이려고 아버지 옷을 입고 빵떡모자를 쓰고 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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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건용,Bodyscape 76-1-2019,2019, 182cm×227cm, 캔버스에 아크릴. 캔버스 뒤에 서서 팔을 뻗어 닿는 만큼 그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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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건용, The  Method of Drawing 76-1, 1976.2018


대학 시절(홍익대 서양화과 졸업)엔 '괴물'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수업시간마다 질문이 많아, 진도가 안나간다고 이경성(전 국립현대미술관장)교수가 붙여줬다. 당시 어머니도 그랬다. "난 걔가 모자라는지 넘치는건지 모르겠어. 속상해 죽겠어, 이상한 질문만 하고..."

억압과 통제의 시대, '청개구리' 같은 작가의 기발함과 저항정신이 녹아있는 작품은 어느새 자본주의에 빠져들고 있는 모양새다. '하트 모양'을 주문하는 것 처럼, '이건용 스타일'이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실제로 페이스 갤러리 측은 "컬렉터들이 헛갈려 한다. 그러면서 대표작이 뭐예요?"라고 묻는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건용은 담담하다. 처음부터 그림 양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00가 팔렸다'더라는 것은 미술을 양식으로 생각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대다수 작가들이 그 작품이 팔리면 형태와 색깔을 바꾸는 것이죠. 또한 미술애호가들도 모든 문화 양태가 못생겼더라도 왜 그런 사유를 하고 있고, 사유의 내용이 무엇이라는 것을 생각하는게 아니라 세련된 형태를 따라가는 겁니다. 선진국에서 있었으니까 양식 스타일을 받아들여서 흉내내는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 이건용의 '신체 드로잉'은 세계 어느 작가도 구현해낸 적 없는 기법이다. 뿌리고 던지고 찢고 붙이기는 했지만, 캔버스 뒤에서 손을 앞으로 넘겨 펜이 닿는 만큼만 그리는 기법은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독특함이다.

이건용은 여전히 "예술의 매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체"라고 강조한다.

 "나는 그린다라는 문제를 특수한 기술이라던가, 테크닉이라던가, 어떤 내용의 신화를 보여주는게 아니다. 대상을 닮게한다는데  관심이 없다. 그린다는 실제적인 문제, 지각의 문제를 말한다. 신체가 평면과 직접적으로 만나는 최초의 일은 선이다. 그게 회화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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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현주 미술전문기자= 이건용이 1975년부터 1980년도에 펼친 손을 이용한 퍼포먼스를 당시 흑백 사진앞에서 재현하고 있다.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건 2016년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 전시 이후부터다. 국립군산대학교 교수로 군산에서 활동하며 묻혀있다, 유난히 존재감을 보인건 지난해 중국 베이징 798예술구에서 연 개인전이다. 첫 중국 개인전이자 세계 미술시장에 눈도장을 찍는 기회였다. 세계 유명 화랑 페이스 갤러리에서 초대한 전시였다. 인파가 몰려와 전시 당시 798예술구에서 큰 화제가 됐다. 중국보다 20여년 앞섰던 한국의 행위 미술 대부의 전시를 직접 볼수 있다는 것과 상업성이 짙어진 중국미술계에서 못느꼈던 '예술의 신선함'으로 중국인들을 홀렸다.

작가는 화랑이 키운다. 결국 '어느 화랑이 손을 대는가'가 관건이다. 특히 세계 유명 화랑이면 단박에 주가가 달라진다. 단색화도 그렇게 부풀었다. 국내 미술관에서 키워 화랑이 띄웠고, 국제화랑이 해외 비즈니스 마케팅을 하면서 가치가 올라갔다. '단색화만 그림이냐'는 비아냥이 들릴 정도로 열풍을 일으켰지만, 4년 만에 국내외 시장에서 '꺼져가는 촛불'이 되고 있다. 국내 상업화랑들이 판매 마케팅에만 치중하면서 ‘거품’ 논란을 부추킬때, 단색화 이후 작가를 찾은 건 해외 화랑이다. 

"왜 이건용이냐고요? 한국에 지사를 내고 나서 한국 작가 연구를 많이 했어요. 이미 단색화는 국내외 화랑들에서 전시를 많이 하고 있었고, 다른 작가를 찾아야겠다고 나섰죠. 제일 이야기가 많이 나온게 이건용 작가였어요. 현재 세계 미술계는 60~70년대 아방가르드 미술을 주도한 작가를 눈여겨 보고 있다는 것도 작용했고. 그렇게 베이징 페이스에서 전시했는데 반향이 뜨거웠죠. 중국 미술계는 어떻게 이런 작업을 70년대에 했는지 놀라면서 신비롭다는 반응을 보였어요."

페이스 서울 이영주 디렉터는 "이건용은 한국의 대표작가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세계 미술시장에서도 더 알고싶다고 해서 앞으로도 적극적인 프로모션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페이스 갤러리는 1960년 뉴욕에서 설립, 가고시안 갤러리와 전세계 현대미술시장을 쥐락펴락하는 화랑이다. 아시아에서는 베이징,홍콩에 이어 2017년 페이스 서울을 오픈했다. 페이스 갤러리의 한국작가 전속은 이우환 화백이 유일하다.

페이스 베이징에 이어 서울에서 이건용의 두번째 개인전이 5일부터 열린다. '現身 현신'을 제목으로 행위예술가로서의 그의 사진, 회화, 조각 등 40 여년에 걸친 그의 작업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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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건용, '장소의 논리', 촬영: 1975; 인화: 1970s 젤라틴 실버 프린트



우리는 모든 문화안에서 지나치게 당대의 스타일과 양식, 사유의 스타일에 매몰되게 살고 있다. 40년전 그리는 것과 그리지 않는 것. 만드는 것과 만들지 않은 것에 천착해온 그의 반항이 '자본주의 미술'에 균열을 내고 있다. 

쪼그리고 앉아 둥근 원을 그린후 여기 저기 거기를 외치던 그의 '달팽이 걸음' 다시 시작됐다. 공유하고 있고 관계론적으로 관계항이 성립될때 장소가 의미를 띈다는 내용인데, 당시엔 저게 작품인가 했다. 또 나무를 뿌리 채 가져다 놓기도 했다. "그러니까 최고의 지성인들도 그때 그 작품을 봤을때 이게 과연 작품인가 생각했을 것이다." 

그 작품같지 않은 것은 '현신(現身)'이 됐다. 몸으로 펼치는 신(scene)은 극대화된 자아의 존재감이다. 이건용의 퍼포먼스가 40여년만에 다시 획기적인 작품으로 부상하고 있는 이유다. 페이스 서울 개인전은 8월24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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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건용,Bodyscape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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