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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지금 성추행 과거사 청산 중

등록 2017-11-26 0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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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AP/뉴시스】미국 할리우드의 거물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이 성추행 전력이 드러나면서 자신이 설립한 제작사 와인스타인 컴퍼니로부터 해고 당했다. 사진은 지난 2014년 3월 2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해 손을 흔들고 있는 와인스타인. 2017.10.09

 
【서울=뉴시스】 이현미 기자 = 미국이 성추행을 비롯해 각종 성적 학대와 관련된 과거사를 청산하느라 진통을 겪고 있다.    

  지난 9월 5일 뉴욕타임스가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행 혐의를 폭로한 것이 발단이었다. 와인스타인이 할리우드에서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많은 여성들을 성추행했으며, 심지어 유명 여배우인 애슐리 저드도 피해를 입었다고 보도한 것이다. 와인스타인은 결국 3일 뒤 자신이 설립한 회사로부터 해고 당했다.

 와인스타인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여배우들의 폭로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영화계에서 시작된 폭로는 지난 3개월간 경제계, 시민사회, 정계, 언론계, 법조계 등으로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미국인들도 놀랄 정도다. 일상의 일터에서부터 정치현장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을 상대로 자행된 성적 학대의 과거사가 얼마나 광범위한지 혀를 내두르고 있다.

 특히 오는 12월 12일 보궐선거에 출마하는 로이 무어 앨라배마주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에 이어 민주당 소속 앨 플랭큰(미네소타) 상원의원, 27선의 민주당 소속 존 코니어스(미시간) 하원의원의 성추행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사실상 이 문제는 국가적 이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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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AP/뉴시스】미국 앨라배마주(州) 상원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로이 무어(70) 후보로부터 과거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베벌리 영 넬슨(55)이 13일(현지시간) 뉴욕에서 기자회견을 열며 무어가 1977년 자신의 고등학교 졸업앨범에 남긴 글을 보여주고 있다. 2017.11.14 

  '미투운동(#MeToo Movement)' 덕분이겠지만, 자칫 폭로만으로 끝날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은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지', '무엇 때문에 이 문제를 지금까지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 해법 중 하나로 미국인들은 과거에 있었던 두 개의 '섹스 스캔들'에 주목하고 있다. 하나는 '애니타 힐-클래런스 토마스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빌 클린턴 사건'이다. 두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제대로 문제를 해결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심각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특히 이는 평소 여성과 인권 등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결정적 순간에는 원칙을 버리고 당파적 선택을 해온 미 진보진영과 민주당을 향한 강한 경고의 성격을 띠고 있어 주목된다.  

 현직 연방대법관인 클래런스 토머스는 지난 1991년 미 역사상 두 번째로 흑인 연방대법관에 지명됐다. 그러자 토머스가 부하 직원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했다는 추문이 돌기 시작했고, 급기야 당시 법대 교수였던 여성 애니타 힐은 고용평등기회위원회(EEOC)에 근무할 당시 토머스가 자신을 성추행했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힐은 토머스의 인준 청문회 증인으로도 출석했었다. 그의 증언은 TV로 생중계 되면서 여성에 대한 성희롱 문제를 전국적으로 부각시켰다.

 하지만 토머스는 인준청문회를 무사히 통과해 지금까지도 연방대법관직을 유지하고 있다. 당시 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다른 여성 증인들이 있었지만 미 상원 법사위원회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토마스는 자신의 부모와 할아버지까지 증인으로 내세워 성추행 주장의 파괴력을 무마시켰다.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부모로부터 배운 것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는 그럴 듯한 반박이 먹혔던 것이다. 당시 법사위원장은 민주당 소속의 조지프 바이든 전 부통령이었다.

 토머스의 성추행 폭로는 지난해에도 있었다. 모이라 스미스라는 이름의 여성 변호사가 토머스가 지난 1999년 디너파티에서 자신의 엉덩이를 손으로 움켜쥐고 몸을 강제로 더듬는 등 성추행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토머스는 지금까지도 건재하다.

 1999년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탄핵사건이 불거졌다. 탄핵사유는 섹스 스캔들, 즉 ‘지퍼게이트’였다.

 클린턴의 지퍼게이트는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지만, 워낙 충격적인 증언들이 잇따라 당시 미 언론들은 이를 여과없이 보도했다.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를 할 때부터 12년간 혼외정사를 했다는 제니퍼 플라워스라는 여성에서부터 폴라 존스, 그 유명한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 카일 브라우닝, 캐슬린 윌리, 엘리자베스 워드, 수전 맥두걸의 폭로 내용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이들의 폭로와 증언은 현재 제기되고 있는 각종 성추행이나 성폭행 의혹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그 정도도 매우 심각했다. 하지만 클린턴은 탄핵되거나 자진사퇴 하지 않았고, 그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던 여성들도 모두 합의금을 받고 소송을 취하했다. 

 미 시사주간지 '디 애틀랜틱'의 케이틀린 플래너건 기자는 지난 13일 '빌 클린턴:판단(Bill Clinton: A Reckoning)'이라는 칼럼에서 “클린턴은 당시 놀라운 힘에 의해 구출됐는데, 그것은 기계 페미니즘(machine feminism)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사실상 자의반 타의반으로 페미니즘이 당파적으로 운영됐다고 지적했다.

 플래너건 기자는 이와 관련해 1998년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뉴욕타임스(NYT)에 쓴 칼럼을 소개하기도 했다. 스타이넘은 칼럼에서 “현대 페미니즘은 민주당에 의해 무기화 된 조력자”라고 맹공격했고, “클린턴은 성중독 치료가 필요한 후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진보진영은 당시 이렇듯 적나라한 지적을 외면했다.

 플래너건 기자는 “클린턴의 성범죄에 대한 진보진영의 관대한 대응은 결국 20년 뒤 하비 와인스타인이라는 자연스러운 결과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민주당은 클린턴을 보호하는 방식에 대해 자체적으로 다시 판단할 필요가 있다”며 “민주당은 클린턴이 이룬 진보적 성취와 막대한 열정에 너무 매혹돼 일부 핵심 원칙을 포기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일갈했다.

 그는 “민주당은 역사의 틀린 쪽에 있었고, 그로 인한 결과들을 우리는 지금 목격하고 있다. 정치와 도덕적 행동이 공존할 수 있다면, 민주당은 심각한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면서 “와인스타인 등 성추행 가해자들이 모두 책임을 질 수 있다면, 우리의 전직 대통령과 민주당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플래너건 기자의 칼럼은 최근 미국사회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NYT, 워싱턴포스트, CNN 등 유수의 미 언론들이 그의 글을 인용하는 보도나 칼럼, 사설 등을 내보냈다.

 급기야 커스틴 길리브랜드(민주·뉴욕) 상원의원은 최근 NYT와의 인터뷰에서 클린턴이 백악관 인턴 르윈스키와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미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힐러리 클린턴을 열렬히 지지했었다.

 물론 민주당에서 이런 목소리가 나오는 게 진정한 반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공화당 후보시절부터 섹스 스캔들이 불거진 바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타깃으로 한 정치적 포석으로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길리브랜드 상원의원도 "지금은 과거와 다르다. 지금은 아주 다른 반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논의에 비춰보면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혐의에 대해 다른 논의를 해야 한다"면서 속내를 내비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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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진영과 민주당이 20~30년 전 잘못된 선택을 놓고 지금 이렇듯 뭇매를 맞는 것을 감안하면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 그리고 보수진영은 현재 미국사회 전반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투운동'을 무겁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은 정치적으로도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여성은 지난해 미 대통령 선거 당시 11명에 달했다. 성인 영화배우 겸 감독인 제시카 드레이크, 요가 강사인 카레나 버지니아, 사진작가인 크리스틴 앤더슨 등이 지난해 대선 당시 잇따라 트럼프 대통령의 성추행 사실을 폭로했다.

 또 선거일을 한달 앞둔 시점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2005년 TV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버스로 이동하다가 유명 방송인과 음담패설을 주고 받았다는 보도가 나왔다. 당시 공개된 녹음 파일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저속한 표현을 사용하며 성관계 이력을 떠벌린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유부녀와 성관계를 시도했으며 유명 인사가 되면 여성들과 쉽게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사업가 시절인 지난 2013년 미스유니버스대회를 모스크바에 유치하기 위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러시아 정부가 제공한 여성들과 섹스파티를 즐겼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런 모든 의혹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부인 또는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성추행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되려면 클린턴과 민주당의 공개적이고 제대로 된 사죄에서 출발해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이 잘못을 공식 인정하는 것에서 마무리 되는 순리라는 지적이다.

 플래너건 기자는 최근 미 공영 라디오방송 NPR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 정치적 이유로 진보진영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전혀 믿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소외당했다. 그들은 조롱당하고 완벽하게 망신당했다. 그리고 우리(진보진영과 민주당)는 그 과거를 묻어버렸다. 그것은 과거의 일이었다. 하지만 과거의 일만은 아니다. 과거에 잘못하고 덮어버려도 그것은 다시 끓어오르기 마련이다. 모든 역사는 다시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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