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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훈의 [월담] 비화 '홍범도 일지'

등록 2019-11-08 14:00:00   최종수정 2019-11-25 17:4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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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만주 항카호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 속 드리마

입말 살아있는 '홍범도 일지' 판소리 대본으로 제격

총과 꽃, 전쟁과 평화를 동시에 수행한 노장의 숭고한 영혼

홍범도 루트야말로 한민족의 미래 지향적 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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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북만주 항카호에서의 홍범도, 왼쪽부터 홍범도, 이인복이 데려온 손녀 예카테리나,  새 부인 이인복.
【서울=뉴시스】정철훈 문화부장 = 1.내가 <홍범도 일지>를 처음 접한 것은 1993년 봄, 모스크바에서였다. <일지>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중 모스크바 세레메치예보 공항 근처의 한 아파트에 사는 고려인 작가 김세일(세르게이 표도로비치) 선생이 <일지>를 보관하고 있다는 소식에 접했다. 빈손으로 찾아갈 수 없어 준비한 게 야생화 꽃다발이었다. 연금생활자 노인들이 푼돈이라도 벌려고 근교 들판에서 꺾어온 야생화를 신문지에 둘둘 말아 쥔 채 유동인구가 많은 지하철 입구에 서 있기 일쑤였다.

 봄이었지만 간간히 눈발이 떨어지는 꽃샘추위의 어느 봄날, 김세일 선생에게 꽃다발을 안기며 현관 안으로 들어섰을 때 선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부인이 차를 끓이는 동안 그는 서가 깊숙이 보관하고 있던 <홍범도 일지>를 꺼내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건 1950년 대 중반, 고려인 노(老)혁명가 이인섭 선생이 건네준 <일지>의 복사본이라오.”
  선생이 내게 보여준 <일지>는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의 고려극장 배우 리함덕이 극장 수위로 말년을 보내고 있던 홍범도로부터 구술을 받아 쓴 이른바 ‘리함덕판 일지’였다.

홍범도(1868~1943)는 1937년 연해주를 떠나 그해 11월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야니쿠르간 사나리크촌으로 이주했고 이듬해 5월 중순 크질오르다로 다시 이주했는데 그에게 주어진 연금은 생활하기에 충분치 않았다. 마침 크즐오르다 고려극장에서 연출 겸 희곡작가로 일하던 태장춘의 주선으로 극장의 수위장을 맡아 보게 되게 된다.

  70세에 이른 홍범도는 매월 80루블의 연금과 50루블의 보수를 받아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홍범도는 자신의 항일무장투쟁활동을 메모 식으로 기록한 ‘목필책’을 갖고 있었고, 이를 기초로 태장춘이 자신의 아내 리함덕에게 홍범도의 구술 증언을 받게 하여 정리한 것이 오늘날 전해 내려오는 <홍범도 일지>의 원형이다.
 
  태장춘은 이 <일지>를 바탕으로 희곡 ‘홍범도’를 완성했고 1941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고려극장에서 채영 연출로 ‘홍범도’가 공연되었다. 연극을 직접 관람한 홍범도는 소감을 묻는 고려극장 배우들에게 “나를 너무 추켜올렸다”며 계면쩍어했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도 그의 인간적 체취를 맡을 수 있다. 이후 고려극장의 배우이자 책임자였던 김진이 우즈베키스탄 안지잔에 거주하고 있던 항일혁명가 출신 이인섭의 부탁을 받고 1958년 4월16일 <리함덕판 일지>를 이인섭에게 전달한다. 이인섭은 홍범도, 이동휘, 김알렉산드라 등 항일영웅들의 전기 집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김진이 보내준 <일지>를 깔끔하게 정리해 <저명한 조선의병대장 홍범도 수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하지만 <리함덕판 일지>는 다시 고려인 작가 김기철 씨가 이인섭에게서 빌려갔으나 김 씨의 부인이 <일지>가 들어있는 남편의 옷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세탁기에 넣고 빨래를 함으로써 유실되고 만다. 다만 이인섭이 원본 유실 전에 베껴 쓴 필사본이 남아 있어서 오늘날 홍범도의 생애와 행적을 어림할 수 있는 건 다행스런 일이다.
 
 애초에 홍범도는 정규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무학에 가깝다. 그래서 이인섭 필사본에는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 많이 눈에 띄고 함경도 지방의 방언이나 속어, 틀린 용어나 한자어 등도 상당수 발견된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바로 그런 점이 <홍범도 일지>가 갖는 사료적 가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때로는 서투르고 때로는 어눌하기도 한 홍범도 장군의 어투와 육성이 DNA처럼 묻어 있는 <일지>를 소리 내어 읽어보면 뜻밖에도 판소리 대본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그만큼 입말이 살아 있는 홍범도의 육성이 들리는 것 같다.

2.
 제2차 세계대전 와중인 1942년 4월 홍범도는 몸담고 있던 고려극장이 우스토베로 옮겨가자 수위를 그만두고 공장노동자로 일했으며 1943년 10월 2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홍범도 장군이 한국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력을 감안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말년이 아닐 수 없다.
 
  다시 <일지>로 돌아가면, 1993년 봄, <일지>를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 펼치던 중, 갈피에 끼어있던 사진 한 장이 툭 떨어졌다. 그건 홍범도 장군이 새 부인 이인복과 이인복이 데려온 손녀 예카테리나와 함께 1929년 연해주 중-러 접경지대인 항카 호숫가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은 헬싱키 대학 고송무 교수(작고)가 1990년 국내에서 출간한 저서 <쏘련의 한인들>에 수록한 것으로, 고 교수가 김세일 선생을 방문하면서 전달한 것이었다.

  1929년이면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둔지 9년 후이다. 과연 사진을 찍은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라는 의문과 동시에 관심을 끈 것은 평범한 농사꾼의 얼굴을 한 홍범도 장군의 친근한 인상과 허리춤에 찬 권총이었다. 이 권총이 1921년 레닌을 만났을 때 받았다는 은제 권총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두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이며 꽃가지를 손에 꺾어든 새 부인과 손녀에게서 인간적인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짐작컨대 이 꽃은 홍범도 자신이 사진을 찍기 전, 항가 호숫가에서 꺾어 새 부인과 손녀의 손에 쥐어 주었을 것이다.
 
  ‘권총과 꽃’이라는 이미지는 전쟁과 평화만큼이나 대조적이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의 비범함은 이 대조적인 이미지와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은 저항과 복수와 전쟁의 상징이지만 꽃은 사랑과 아름다움과 평화의 상징이 아니던가. 홍범도 장군의 순수하고도 강인한 정신은 이항대립의 두 사물 사이에 존재한다.

  어떤 일은 100년이 걸리기도 하고 혹은 30년이 걸리기도 한다. 내가 항카 호수변의 도시 당벽진에 발을 디딘 건 세일 선생으로부터 <일지>를 건네받은 지 무려 27년이 지난 2019년 8월의 일이다. 
 
 항카 호는 만주에서 가장 큰 호수이자 중국에서 칭하이 호 다음으로 큰 호수이다. 크기는 약 4300㎢에 달하며 이는 동아시아 전체로 봐도 두 번째로 큰 규모다. 위치는 동경 132도 25분, 북위 45도 0분으로 북한의 함경북도 위에 있다. 러시아 연해주 지방과 중국 흑룡강성을 분할하는 국경이 이 호수 가운데를 지난다. 

부채꼴 모양의 담수호인 항카 호는 평균 수심은 4.5미터, 최대 수심은 10.6미터이며 수원의 대부분은 아무르 강에서 유입된다. 담수호라는 점 때문에 선사 시대부터 인간의 거주지 가운데 하나로, 근방에서 신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출토되기도 한다. 퉁구스계 유목민인 숙신족과 한민족의 조상 격인 예맥족과도 관련이 깊으며, 전성기 고조선의 북동쪽 국경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발해 시절엔 주현을 설치하고 다스린 영토의 일부로, 15부의 하나인 동평부에 속했고 이때는‘미타호’로 불렸다. 호수 동쪽에 미주, 서쪽에 타주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잡히는 잉어가 동평부의 특산물이었으니 발해 사람들은 이 잉어를 일본까지 수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 사람이면 중국식 ‘흥개호’나 러시아식 ‘항카호’ 대신 ‘미타호’라는 지명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3.
 다시 홍범도로 돌아오면 홍범도의 첫 부인은 이 씨다. 일부 학자는 이 씨 부인의 이름이 옥녀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뚜렷한 증빙이 발견되기까지는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이 씨 부인은.처녀 때 비구니였다. 함남 북청 출신인 그는 일찍이 친정을 떠나 금강산 깊은 산속에 위치한 비구니 사찰에서 승려의 길을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금강산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24살 홍범도는 금강산 신계사 지담 스님의 상좌승으로 있었다. 평양 주둔 조선군 친군서영 제1대대 군인 출신인 홍범도는 제지 수공업자로 일할 때 부당한 대우와 체불임금에 항의해 공장주를 살해한 혐의로 쫓기고 있었다.
 
  젊은 남녀가 금강산 깊은 산속에서 어떤 가슴 설레는 과정을 거쳐 연인이 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머잖아 젊은 여승은 임신하기에 이른다. 큰아들 홍양순을 잉태한 것이다. 두 사람은 승복을 벗고 하산하기로 한다. 우여곡절을 거쳐 두 사람이 정착한 곳은 이씨 부인의 친정이 있는 북청 안산사 노은리 인필골 마을이었다. 북청에서 갑산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후치령 고개 바로 아래였다. 그곳에서 부부는 짧으나마 단란한 가정생활을 꾸린다. 아들 둘을 얻었으니 큰아들 양순과 작은아들 용환이다.
 
  1908년 북청에 주둔한 일본군 야마모토 대좌는 ‘홍범도 폭도 무리’들의 귀순공작을 강화키로 하고 홍범도의 늙은 장모와 아내, 그리고 두 아들과 살고 있는 인필골을 급습한다.
  홍범도의 아내와 17살 맏아들 홍양순은 주둔지로 압송되었다. 이 씨 부인은 거센 강압을 받았다. 산중으로 피신한 남편 앞으로 투항을 권하는 편지를 쓰라는 거였다. 아예 문안까지 일러줬다. 저들은 이 씨 부인이 글을 깨쳤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응하지 않으면 모진 고초를 각오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씨 부인은 거절의 뜻을 단호히 표명했다.
 
  “계집이나 사나이나, 영웅호걸이라도 실 끝 같은 목숨이 없어지면 그뿐이다. 내가 설혹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인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더러 시킬 것이 아니라 너희 맘대로 해라. 나는 아니 쓴다.”
  이 씨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노년의 홍범도는 <일지>에 적었다. 
 
  이 씨 부인은 혹독한 보복을 당했다. 무지비한 고문이었다. 이씨 부인은 스스로 혀를 끊어 고문에 맞섰다고 한다. 벙어리가 된 그는 갑산 읍내로 이송돼 옥에 갇혔으나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30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40살에 아내를 잃은 홍범도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혼자 살았다. 새 아내를 얻을 생각도 없었다. 그러다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새 아내 이인복을 맞아들인 것은 20년이 지난 61세 노년의 일이었다.

 1929년 홍범도가 새 부인과 함께 사진을 찍은 곳이 러시아 연해주 항카호수인지, 중국 당벽진 쪽 흥개호수인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느낄 수 있었다. 홍범도는 항카호에도 흥개호에도 있었고 블라디보스톡에도 있었고 크즐오르다에도 있었다. 북만주와 연해주와 카자흐스탄의 모든 곳이 홍범도의 활동무대였다. 나는 오래 전 김세일 선생에게 건넨 것과 같은 야생화 한 다발을 당벽진 쪽 흥개호, 아니 미타호에 띄워놓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4.
  홍범도 장군의 보다 진한 인간적인 체취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일지>에 투영된 그의 문체이다. 원문 그대로 한 대목을 소개해본다.
 
 “그날 밤으로 도망하여 박말령 영상에 당한즉 해가 산등에 올라오니 일본 놈 세 놈이 나를 붓뜰려고 왓던 놈이 원산으로 넘어가는 것을 몰수히 다 잡앗습니다. 그 총 세대를 아사서 두 대는 따에다 뭇고 철 삼백 개, 그 놈들 먹는 과자, 쌀 둘추어 바랑에 거더넣고  지경산 꼭뚜에 올나 한돈하고 덕원 무달싸에 와서 산속에서 자고 덕원읍시 좌수로 있는 전성준 놈에 집에 야밤에 달려들어 일본돈 팔천사백십원을 달내 가지고 무달싸 어귀에서 전성준 놈을 쏘고 평양도 양덕으로 넘어가서 양덕으로 성천으로 여원으로 단니면서 산간으로 준삼년을 혼자 의병을 하다가 철없고 의포 없고 신발없고 그상하다 못하여 그만 변성명 하엿던 것을 버리고 제 홍범도로 부르면서 함경도 북청 단양리가에서 세방들어 팔년을 농사하여 먹다가 일본놈과 노시야와 전쟁할 때 갑진년에(1904)…. 또 내가 다시 구월 초 팔일에 다시 나섯습니다.”

  나는 이게 판소리의 대본이 되고도 남는다고 생각한다. 평안도 사투리에 묻어있는 토속적 투박함은 물론이고 <일지>를 따라 읽다보면 저절로 신명이 나고 어깨가 들썩거리기 마련이다. 실은 홍범도 장군이 갖고 있었다는 목필책이 그가 직접 쓴 것인지, 아니면 부대원 가운데 글줄이나 쓰는 서기(書記) 비슷한 사람이 홍범도가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남아 산중에 은거하던 시간에 틈틈이 구술을 받은 것인지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지>의 모든 팩트는 홍범도 자신의 것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홍범도 장군은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고 생각한다. <일지>의 첫 문장을 보면 이런 생각은 더욱 확연하다.

“1868년 고려 평양 서문안 문열사 앞에서 탄생하여 모친은 칠 일만에 죽고 아버지 품에서 여러분의 유즙(젖 : 필자)을 얻어먹고 자라 초 구세에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니 남의 집으로 다니며 머슴살이로 고생하면서 십오 세가 되므로 나이 두 살을 올려 평양 중국의 보단(步段)으로 호병정(胡兵丁) 설(設)할 때 우영(右營) 제 일대대에서 코코수(나팔수:필자)로 사연을 있다가(복무하다가: 필자) 사연을 치고 도망하여 황해도 수안 총령(蔥嶺) 종이뜨는 지막 제지소에 와서 종이뜨기를 배워 삼년을 뜨다가 그때는 어느 때인고 하니 병술(丙戌:1886년) 정해(丁亥:1887년)쯤 되었다.”

 그렇다면 <일지>엔 어떤 내용 담겨 있을까. 연구자에 따르면 <일지>에서 홍범도가 자신의 유년과 청∙장년기를 서술하고 있는 분량은 단지 1쪽을 약간 넘고 있다. 이는 전체 분량의 3.5% 비중이다. 그러나 홍범도의 의병항쟁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은 약 12쪽 반으로서 전체의 43.9%를 차지한다. 그리고 재기 도모시기의 비중은 3쪽 반으로 전체의 12.3% 정도, 가장 중요한 시기인 간도에서의 독립전쟁 시기는 5쪽 반 분량으로 19.3%이다.

  소련에 온 이후의 만년에 해당하는 시기의 비중은 약 6쪽으로 거의 21%의 비중이다. 집필 비중을 분석해 보면 분량이 가장 많은 부분이 의병투쟁시기로서 전체의 절반에 가깝다.
  결국 우리는 홍범도가 의병투쟁에 관한 부분을 가장 구체적으로, 그리고 상세하게 회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이러한 서술을 초래한 배경에는 어쩌면 태장춘의 요구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궁극적으로 만년의 홍범도가 자신의 생애 가운데 자신 있게, 확실히 기억하고 있던 시기는 의병투쟁기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명확하다. 또한 소련 연해주에서의 노년기에 대한 서술 내용이 두 번째로 많은 이유는 <일지>를 구술한 시기와 근접한 때에 일어났던 사건과 행적을 기억하기 쉬웠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1908년) 5월 초 2일 구름물령(일명 雲波嶺) 넘어오다가 일병 32명이 오는 것을 목잡고 기다리다가 일시에 쏘아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다 죽이고 총 30개, 군도 두 개, 탄환 300개, 단총 네 개 빼앗아 가지고 갑산 청지평 싸움에서 의병 11명 죽고 일병 90명을 즉살시켰다”라는 승전 사실에 대한 세세한 기억 등은 독립에 대한 염원이 그만큼 컸음을 우회적으로 반증한다.
 
  한국소설사에서 18~19세기는 한 마디로 소설의 시대라 할 만큼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이야기꾼이 전문적 직업적인 예능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이들은 성격상 대개 강담사(講談師), 강독사(講讀師), 강창사(講唱師)로 구분했다. 이 중 이야기책이나 소설을 청중에게 낭독하던 강독사에 대한 이야기는 조수삼(1762~1847)의 『기이(紀異)』에 실려 있다. 우리가 전기수(傳奇叟)’라고 알고 있는 이야기꾼이 그것이다. 홍범도가 리함덕에게 <일지>를 직접 구술할 때 전기수와 마찬가지로 음성의 고조는 물론 표정의 변화, 구수한 음색이 저절로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일지>의 입말에 그토록 생생하게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제안하고 싶다. 국악인은 물론 누구라도 <홍범도 일지>를 판소리 대본으로 삼은 창(唱)을 읊조려 보시라고. <홍범도 일지>는 두 동강 난 한반도에 갇혀 신음하는 민족의 미래를 홍범도의 DNA가 배어있는 중앙아시아까지 연장시킬 소중한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5.
2019년 4월 21일 카자흐스탄을 국빈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고려인 애국지사 계봉우와 황운정 유해의 고국 송환을 약속한데 이어 홍범도 유해 송환도 추진하겠다고 했으나 현지 고려인들의 존치 여론이 높아 실현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홍범도 장군의 묘소는 현재 크즐오르다공동묘지에 있다. 고려인들이 돈을 모아 흉상을 제작하고 비석을 세운 묘소이다. 홍범도는 그만큼 고려인들의 자존심이자 자존감의 상징적 인물이다.

한반도 북쪽 평양 근처에서 태어나 북만주와 연해주를 전전하다가 레닌을 만나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고 은제 권총을 선물로 받은 항일 영웅 홍범도의 DNA가 묻혀있는 땅이 중앙아시아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그의 유해가 남한으로 돌아올 명분은 약하다.

홍범도가 묻힌 그 자리는 그 자신이 온 몸을 다해 밀고 나간 생애의 마지막 지점이자 우리 민족의 육체성이 지구의 배꼽이라할 중앙아시아에 다다른 도저한 상징성이 있다. 굳이 유해송환이라는 아젠다를 꺼내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정신적 지주를 흔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홍범도는 남한에도 북한에도 속하지 않은 세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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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홍범도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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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고려인 전기작가 이인섭이 필사한 '홍범도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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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홍범도'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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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벽진=뉴시스】정철훈기자=북만주 당벽진 거리. 중-러 접경지역이어서 러시아풍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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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벽진=뉴시스】정철훈기자=북만주 당벽진에서 접근한 항카호수. 홍범도 장군과 그 일행은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은 이 호수를 건너 중국과 러시아를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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