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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육상실크로드’ 거점, 신장을 가다②]초원과 사막의 땅 '서역', 이제는 중국

등록 2016-07-28 08:44:34   최종수정 2016-12-28 17:2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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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무치=뉴시스】중국 신장자치구 우루무치 시내 고속철도 역사 내 ‘일대일로’ 광고판.
【우루무치=뉴시스】김정환 기자 =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신강유오이, 이하 신장) 자치구는 중국 시베이(西北;서북)쪽 끝으로 간쑤(甘肅;감숙)성과 칭하(靑海;청해)성) 왼쪽, 시짱(西藏;서장) 자치구(티베트) 위쪽에 있는 자치구다.  

 면적은 166.49만㎢로 중국 영토의 6분의 1이나 되는 광활한 지역이다. 몽골,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등 8개국과 맞닿았으며, 국경선 총 길이는 5400㎞에 달한다.

◇중국 영토 6분의 1…46개 소수민족

 한(漢)족 외에 웨이우얼(維吾爾;오이·위구르)족, 카자흐족(哈萨克;합살극)족, 후이((回;회)족 등 46개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이 지역을 신장웨이우얼이라 칭하는 것은 자치구 내 인구 분포에서 위구르족이 한족보다 아직 많고, 위구르족의 99%가 이 지역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자치구 수부는 우루무치(烏魯木齊)다. 예로부터 ‘초원과 사막의 땅’으로 여겨질 정도로 대륙성 건조 기후를 보인다.

 신장은 중국 춘추 전국시대는 물론 진(秦), 한(漢)나라 때까지 ‘서역(西域)’이라 불리던 곳으로 유목 민족의 터전이었다. 신장이 중국사에 사실상 처음 등장한 것은 한나라 때다.

 중원을 위협하던 북방의 강자 흉노를 막기 위해 진나라 시황제는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흉노의 위협은 지속했다. 진을 이은 한나라의 제3대 무제는 BC 138년 흉노에 대항해 오랑캐로 오랑캐를 막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펴기로 하고 월지족 등과 동맹을 맺기 위해 장건을 이 지역에 파견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가 서역의 유목민족 국가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실크로드가 만들어졌다.

 당나라 현종 당시 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선지 장군의 정벌 등을 통해 서역은 중국 영토가 됐으나 이후 중국이 분열하고, 이후 중국 역대 왕조는 요(거란)·금(여진)·몽골 등 흉노를 잇는 북방 이민족 국가와의 투쟁에 몰두하게 되면서 신장은 돌궐(투르크)계인 위구르족 등 유목 민족의 터전으로 다시 바뀌었다.

 1750년대 여진족(만주족)이 세운 청(淸)나라의 제6대 건륭제(乾隆帝, 1711~1799)는 달랐다. 군대를 휘몰아 톈산산맥(天山山脈) 북쪽 서몽골을 복속시킨 여세를 몰아 1759년 산맥 남쪽 위구르 지역, 즉 신장을 평정하고 부족장을 통해 이를 간접 지배했다.

◇위구르족의 저항은 아직 ?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00여 년간 위구르인은 계속 저항해 1864년 마침내 청  세력을 몰아냈다. 물러났던 청은 1884년 더 강하게 이 지역을 침공, 아예 ‘성(省)’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해 직접 통치했다. 지명 역시 기존 서역을 대신해 ‘새로운 영토’라는 뜻의 ‘신장(新疆)’으로 통일했다. 또한 내지인이 이주하는 것을 금했던 정책을 없애고 한족(漢族)을 이주시켜 철저히 중국 영토로 만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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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무치=신화/뉴시스】지난해 5월10일 중국 신장자치구 우루무치에 있는 신장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신장웨이우얼자치구 선포 60주년 기념행사.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나라가 붕괴한 뒤 신장은 중국 내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군벌이 지배하게 됐고 이들에 맞서 위구르인은 독립운동을 펼쳤다. 1933년 소련의 지원을 받아 카슈가르(喀什)를 중심으로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을 세웠으나 3개월 만에 소멸한 뒤, 1943년 다시 나라를 재건했다.

 하지만, 1949년 국공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뒤 인민해방군을 이 지역에 진주시켜 이를 다시 원점으로 돌린 뒤 실질적인 지배에 들어갔으며, 1955년 10월1일 자치구로 삼았다.

 중국 정부는 청나라의 한족 이주 정책을 이어받아 황무지 개척과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군사와 생산 복합조직인 ‘신장 생산 건설병단’을 통해 한족의 대규모 이주를 단행했다.

 이를 통해 신장에서 1955년까지 7대 3이었던 위구르족과 한족 간 인구 비율은 현재 6대 4 이하로 줄었다. 우루무치 등 북쪽에서는 오히려 한족(75.3%)이 위구르족(12.8%)을 압도할 정도다. 위구르족은 카슈가르 등 남쪽을 중심으로 거주한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이주민인 한족이 원주민인 위구르족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경제 대국이 된 중국 정부가 이 지역에 지속해 투자하면서 상당수 위구르인은 중국 내 다른 50여 소수민족처럼 정부 정책에 부응해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분리독립운동단체인 ETIM(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 등 일부 위구르족은 민족(투르크계)·종교(이슬람교)·문화·언어 등 여러 면에서 한족과의 차이를 들며 여전히 독립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1990년대 소비에트 연방(소련) 붕괴 후 무슬림 투르크계가 주로 거주하는 중앙아시아 지역이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이라는 이름으로 독립 국가가 된 것에 자극받은 데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제는 위구르족과 한족 간 경제적인 격차에 대한 일각의 불만에 이슬람 극단주의의 영향까지 더해지면서 실제 지난 수년 사이 여러 차례 위구르족 개인 또는 조직의 테러가 발생해 우려를 낳고 있다.

 ace@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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