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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낚시줄을 당긴다,관객의 마음줄을...이자람 '노인과 바다'

등록 2019-11-27 17:53:54   최종수정 2019-12-09 09:2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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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의 신작 판소리...헤밍웨이 동명소설 각색

두산아트센터에서 12월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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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제6회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자인 소리꾼 이자람이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신작 '노인과 바다'를 선보이고 있다. 이자람이 각색, 작창한 판소리 '노인과 바다'는 11월 26일부터 12월 1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한다. 2019.11.25.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살아온 모든 삶을 담아 낚시 줄을 당긴다~!"

소리꾼 이자람은 '오늘날 강태공'임이 분명하다. 미끼를 끼우지 않은 바늘로 낚시를 하며 물고기가 아닌 세월을 낚은 강태공처럼 그녀는 관객들의 삶을 단숨에 낚아챘다.

26일 서울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개막한 판소리 '노인과 바다'에서 이자람의 목소리와 고수 이준형의 소리북 장단만으로 벌어진 마법이다. 

1부 마지막. 망망대해 한 가운데 노인 '산티아고'가 800㎏짜리 청새치(원작에서는 700㎏인데 이자람은 판소리에서는 더 무거워야 할 것 같아 100㎏을 추가했단다)와 격렬한 싸움을 벌이는 장면의 스펙터클은 어떤 블록버스터 영화보다 흥미진진했다.

소리꾼 홀로, 장단에 맞춘 목소리만으로 온 세상을 그려내는 판소리의 기적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녹초가 된 가운데도 눈빛만은 형형한 '노인과 바다' 속 산티아고가 관객들 앞에 현현했다.

그런데 그 산티아고는 이자람이기도 했다. 소리뿐 아니라 대본·작창까지 도맡은 이 작품에서 청새치는 판소리였다. 산티아고와 청새치의 싸움은 이자람과 판소리의 싸움으로 대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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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제6회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자인 소리꾼 이자람과 고수 이준형이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신작 '노인과 바다'를 선보이고 있다. 이자람이 각색, 작창한 판소리 '노인과 바다'는 11월 26일부터 12월 1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한다. 2019.11.25. [email protected]
 
기적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관객들도 저마다 삶에서 싸울 대상을 찾게 된다. "판소리 하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드냐"고 이자람이 목 놓아 부르짖을 때 관객들은 저마다 삶의 힘듦을 그곳에 실려 날려 보낸다.

'노인과 바다'는 한국 공연계에 암묵적으로 스며든 엄숙주의를 유쾌하게 타파하는 공연이기도 했다. 우리 관객은 공연을 보러 갈 때 저도 모르게 경직된다. 그런데 판소리는 원래 판에서 소리꾼과 관객이 교감하는 장르다. 관객의 추임새가 소리꾼에게 힘을 불어넣어주고 공연의 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자람 표 '노인과 바다'는 최근 공연 중 관객 참여 면에서 가장 탁월했다. 수궁가를 변주한 심해 신에서 관객들은 은은한 푸른빛의 옷을 걸치게 된다. 스마트폰 플래시를 켜도 된다. 이자람의 부채가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관객들은 갑오징어 또는 해초 등이 돼 나풀거린다.

이자람은 인기 가수 콘서트의 객석에서 파도타기를 하는 것을 본 뒤 따라해보고 싶었단다. 그런 이자람의 바람을 '시노그래퍼' 여신동이 아이디어로 승화시킨 것이다. 공연예술 공간을 구상하며 무대미술 전반을 다루는 이가 시노그래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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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제6회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자인 소리꾼 이자람이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신작 '노인과 바다'를 선보이고 있다. 이자람이 각색, 작창한 판소리 '노인과 바다'는 11월 26일부터 12월 1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한다. 2019.11.25. [email protected]
이런 참여형 공연이 불편한 관객도 걱정은 접어두시길. 갑오징어 또는 해초가 되기 싫으면 스스로를 바위로 생각하면 된단다. 바다 속에는 바위도 많다. 이런 따듯한 배려와 다양성을 존중하기까지 하는 공연이다.

이렇게 대중적이라고 소리가 쉬울 것이라는 생각은 아서라. 소리의 변화는 드라마틱하고 성악의 베이스를 연상케 하는 저음까지 나온다. 수궁가는 물론 마침내 청새치를 잡은 장면을 승화시킨 춘향가의 '사랑가' 등 기존 판소리도 자유롭게 변주된다. 관객이 잠시나마 자진모리 장단을 배워볼 수 있는 시간도 있다.

이처럼 탁월한 균형 감각이라니. 이자람은 판소리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도 대중성을 아우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국립극장 전속단체 국립창극단과 손잡은 1인 창극 '빨간망토'에서 연출, 국립창극단이 경극과 창극을 결합시킨 수작 '패왕별희'에서 작창·작곡·음악감독을 도맡고, '아마도이자람밴드' 활동도 꾸준히 병행해온 이자람의 스펙트럼은 한층 넓어졌다

총체극 '도리안 그레이'에서 소리 없이 연기만 한 배우 이자람도 빛났지만 모든 것을 아우르는 소리꾼 이자람은 더 빛났다. 호수 위 백조처럼 수면 밑에서는 끊임없이 발장구를 치겠지만, 공들여 깔아 놓은 판 위에서 그녀의 얼굴은 평안해보였다. 캄캄한 다른 장르의 공연과 달리 판소리 공연장은 환하다. 그래서 관객들 얼굴도 잘 보였는데 모두 미소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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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제6회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자인 소리꾼 이자람이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신작 '노인과 바다'를 선보이고 있다. 이자람이 각색, 작창한 판소리 '노인과 바다'는 11월 26일부터 12월 1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한다. 2019.11.25. [email protected]
이자람과 꾸준히 호흡을 맞춰온 양손프로젝트의 박지혜가 연출도 빛났다.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아는 박 연출은 이자람, 이준형을 원래 있는 자리로 되돌려놓음으로써 연출력을 발휘하는 묘를 발휘했다.

박 연출은 원작에서 노인의 친구인 16세 소년 '마놀린'을 16세 소녀 '니콜'로 변경하는 것을 제안도 했다. 청새치 낚시로 세계 신기록을 세운 사람이 '몰리 팔머'라는 미국인 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 착안해냈다. 시대의 흐름을 탄 것은 아니다. 사람 대 사람이 교감하는데 나이, 성별을 한정할 수 없다는 창작진의 생각이 자연스레 반영됐을 뿐이다. 

이처럼 이자람 판소리 '노인과 바다'는 쿠바의 작은 어촌 '코히마르 마을'에 사는 노인 어부의 이야기를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만든다. 고독한 노인의 분투기로 여겨지던 원작에 따듯한 햇살을 쬐인다. 이자람의 작품에 대한 애정은 동물, 자연, 사람과 교감하는, 따뜻한 기운이 스며든 이야기의 원료가 됐다.

어느날 청새치를 만나 힘겨운 싸움을 벌여도 삶은 계속된다는 '작은 기적'을 보여준다. 그것은 평범한 삶의 숭고함이다. 판소리를 보는 일 역시 숭고한 의식이다. 이처럼 판소리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공연 장르라는 것을 이자람은 보여준다. 이 시대의 위로가를 만났다. 이자람은 세월뿐 아니라 사람 마음까지 낚는 어부다. 12월1일까지 서울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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