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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종 문화소통]훈민정음 가획의 원리, ‘거셈’이 아니라 ‘빠름’

등록 2020-01-29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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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종의 ‘문화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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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훈민정음 해례본에 총 7회 쓰인 ‘厲(려)’자는 ‘세다’가 아니라 ‘촉급하다, 소리가 높고 빠르다’의 뜻을 나타낸다.
[서울=뉴시스]  세계의 문자학자들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훈민정음의 뛰어난 특질 하나가 있다. 비슷한 소리들은 가획이란 방법을 통해 시각적으로도 서로 유사하게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어금닛소리 ‘ㄱ’과 ‘ㅋ’이 그렇고, 혓소리 ‘ㄴ·ㄷ·ㅌ’, 입술소리 ‘ㅁ·ㅂ·ㅍ’, 잇소리 ‘ㅅ·ㅈ·ㅊ’, 목구멍소리 ‘ㅇ·ㆆ·ㅎ’ 모두 글자 형태면에서 서로 긴밀하다.

이처럼 가획으로써 자형에 음성적 특질(자질)을 반영한 것을 넘어 더욱 놀라운 사실은 가획을 하는 뜻이 무엇인지를 훈민정음 해례본에 밝혀놓았다는 점이다. ‘훈민정음해례’ 편 1~2장의 “ㅋ比ㄱ, 聲出稍厲, 故加劃。 ㄴ而ㄷ, ㄷ而ㅌ, ㅁ而ㅂ, ㅂ而ㅍ, ㅅ而ㅈ, ㅈ而ㅊ, ㅇ而ㆆ, ㆆ而ㅎ, 其因聲加劃之義皆同”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번역하면, “ㅋ은 ㄱ에 비해 소리 나는 것이 조금 ‘厲(려)’한 고로 ㄱ에 획을 더하였다. ㄴ→ㄷ, ㄷ→ㅌ, ㅁ→ㅂ, ㅂ→ㅍ, ㅅ→ㅈ, ㅈ→ㅊ, ㅇ→ㆆ, ㆆ→ㅎ는 그 소리로 인해 가획한 뜻은 모두 같다”이다.

해례편 9장 뒷면에선 훈민정음의 제자원리와 가획간의 관계를 “正音制字尙其象(정음제자상기상), 因聲之厲每加劃(인성지려매가획)”이란 문장으로 명시해놓았다. 이에 대해 한글학회 편 ‘훈민정음 옮김과 해설’에서는 위 문장의 ‘厲’ 자를 ‘거세다’의 뜻으로 보고 “정음의 글자 만듦에 그 꼴과 짝지어서, 소리가 거세어짐에 따라 매양 획을 더하였다”고 번역했다.

훈민정음의 제자원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항인 ‘가획’에 대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훈민정음의 초성을 제자할 때 동일 조음 위치의 음들 중 이미 만든 글자의 음보다 더 센 음의 글자를 만들기 위하여 추가하는 획”.

이 정의에서 ‘더 센 음’ 부분은 훈민정음 해례본 내 “聲出稍厲(성출초려)”의 ‘厲(려)’자를 ‘세다’의 뜻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ㅋ·ㅌ·ㅍ·ㅊ’을 ‘거센 소리’ 또는 ‘격음(激音)’이라 부르는 근거 또한 해례본 내의 ‘厲(려)’자에 있음은 물론이다.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발간 ‘한한대사전’에 실린 ‘厲(려)’에는 확실히 총 39개의 뜻 중 12번 항목에 ‘세차다·격렬하다’의 뜻이 있다. 그러나 음을 다루는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厲(려)’가 ‘세다’가 아닌 다른 뜻으로 쓰였다면 어찌할 것인가? 훈민정음 가획의 핵심 이유인 ‘厲(려)’자를 오역해 왔다면, 지금이라도 정정해야 한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쓰인 특정 용어들은 해례본이 ‘음’에 관한 음운서인 까닭에 당연히 ‘소리’의 관점에서 쓰인 것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사진> 속, 소리와 관련된 제13번 의미 ‘촉급(促急)하다, 소리가 높고 빠르다’에 주목하면서 해례본을 정밀하게 살펴보자.

해례본에는 ‘厲’자가 총 7회 등장한다. 그 중 <사진>에서처럼 해례 종성해 편 17~18장의 ‘厲’자 부분은 다음과 같다.

“소리에는 느리고 빠름의 다름이 있는 고로, 평성·상성·거성은 그 종성의 빠르기가 입성의 촉급함과 같지 않다 불청불탁의 글자들(ㆁ·ㄴ·ㅁ·ㅇ·ㄹ·ㅿ)은 그 소리가 ‘厲하지=빠르지 않으므로’ 종성으로 쓰면 평·상·거성에 알맞고 전청·차청·전탁의 글자들은 그 소리가 ‘厲하므로=촉급하므로’ 종성에 쓰면 입성에 알맞다(聲有緩急之殊, 故平上去其終聲不類入聲之促急。 不淸不濁之字, 其聲不厲, 故用於終則宜於平上去。 全淸次淸全濁之字, 其聲爲厲, 故用於終則宜於入。)”

위 문장 서두에선 “소리에는 느리고 빠름의 다름이 있다”라고 운을 뗐다. 따라서 누구나 그 뒷부분은 소리의 느리고 빠름을 설명하는 대목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세종은 ‘어제훈민정음’ 편에서 종성 ‘ㄱ·ㅂ·ㄷ’으로 대표되는 입성의 특징에 대해 ‘촉급’하다고 밝혔다. 그것과 함께 위 문장을 보면, ‘厲(려)’는 문맥상 ‘세다’가 아니라 ‘소리가 높고 빠르다’의 뜻일 수밖에 없다. 다만, 위 문장 속 ‘全濁(전탁)’ 부분에 대해선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계속>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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