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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종 문화소통]훈민정음에선 ‘붓’이 ‘·붇’이다

등록 2020-03-18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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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종의 ‘문화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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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훈민정음에선 ‘붓’을 ‘붇’이라 표기했다. 갑골문자 ‘筆’은 오른손(又)으로 대나무붓을 붙들고 있는 모습으로, 진나라 때 ‘竹’이 추가됨. 筆의 원음은 ‘붇’으로 추정되고 ‘빋’은 진나라의 변음.
[서울=뉴시스]  종성이 ‘ㄱ, ㄷ, ㅂ’으로 대표되는 입성(入聲)은 촉급한 것이 특징인 ‘촉성(促聲)’이다. 다만 빠른 소리이되 우리말 입성의 음높이는 한자어냐 토속어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우리말 한자어 입성의 경우, 그 음 높이는 모두 거성(去聲)처럼 높다. 따라서 한자어 입성은 모두 ‘높고 빠른 소리’다. 그에 비해 우리말 토속어 입성의 음높이는 일정하지가 않다.

<사진>에서 보듯, ‘훈민정음해례’ 편 22장에 기재된 ‘·붇(筆)’과 ‘·입(口)’의 경우 글자 왼쪽에 제일(1) 높은 소리를 나타내는 한(1) 점이 찍혀 있다. 오늘날 ‘못’으로 쓰지만 ‘몯’으로 발음되는 ‘·몯(釘)’의 경우도 높은 소리여서 한 점이 표시돼 있다.

반면 기둥의 본말인 ‘긷(柱)’, 그리고 ‘옆’의 어원이자 ‘옆구리’의 옛말인 ‘녑(脅)’자는 평성처럼 낮은 소리라 점이 없다. 그리고 곡식의 알을 뜻하는 ‘낟(穀)’과 ‘깁다’의 어간인 ‘깁(繒)’의 경우엔 소리가 ‘↗’처럼 아래에서 위로 상승하므로 상성 표시인 두 점을 찍었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에서 글자 왼쪽에 두 점(:)을 찍었던 우리말 상성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되 그 올라가는 속도가 빠른 소리였다. 그러던 것이 그 속도가 점차 느려져 현대한국어에 와서는 많은 상성들이 장음으로 변했다. 위 ‘깁’의 경우, 장음으로 변하되 현대한국어에선 평성화하였고, ‘깁다’의 ‘깁’은 장음으로 변하되 높은 소리인 거성화하였다.

공교롭게도 서양언어학의 장음 표시 ‘:’이 훈민정음의 상성 표시 두 점 ‘:’과 같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착각을 유발케 한다. 이와 같은 요인들로 인해 현대의 많은 국어학자들은 세종 때의 우리말 상성이 긴소리였을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당나라 때의 승려 처충(處忠)이 지은 ‘원화운보(元和韻譜)’에서 “상성은 빠르고 들어 올리는 소리(上聲者厲而舉)”라 하였고, 명나라 진공의 ‘옥약시가결(玉鑰匙歌訣)’에서 “상성은 (아래에서 위로) 높게 소리 지르되 급격하고 강한 소리(上聲高呼猛烈強)”라 하였듯이 본래의 상성은 빠른 소리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표준국어대사전 등에서 ‘깁다’를 ‘[깁ː따]’로 장음 표시한 것은 ‘깁’의 본래 음가인 상성과는 무관한 현대의 변음임을 이해해야 한다.

만약 세종께서 지금의 변한 ‘깁다’ 소리를 듣고 훈민정음으로 표기한다면 ‘·낍다’가 될 것이다. 현대한국어에서 ‘깁다’의 ‘깁’은 높은 소리여서 훈민정음 철자법으론 거성 표시 한 점을 찍고, 또 ‘ㄲ’으로써 긴소리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4성 관련 앞 편의 두 글들에 이어 재언하건대, 훈민정음에선 상성이 짧은 상성도 있었고 긴 상성도 있었다. 그 장단음 여부는 전탁(ㄲㅃ)과 전청(ㄱㅂ)으로 구별했다. 지금의 한글맞춤법 표기에선 구별되지 않는 ‘補(기울 보)’와 ‘輔(도울 보)’의 경우 훈민정음에선 그 표기가 달랐다. ‘補’는 짧은 상성이라 ‘:보’라 적었고, ‘輔’는 긴 상성이라 ‘:뽀’로 적었다.

<사진>에서처럼, 현대한국어에서 ‘붇’으로 발음되는 ‘붓’은 훈민정음 해례본에선 ‘붇’으로 표기했다. 우리나라 한자음 중 종성 ‘ㄹ’은 본래 입성 ‘ㄷ’ 소리가 변하여 가볍게 된 것이라는 해례편 19장의 설명처럼 ‘붇’이 ‘筆(필)’의 원음 ‘빋’과 관련돼있기 때문이다. ‘빋(筆)’은 조선에서 ‘빌’로 변한 뒤 다시 ‘필’로 변하였다. 비록 종성 받침에서 ‘ㅅ’과 ‘ㄷ’은 같은 소리로 발음되지만, 이처럼 세종은 종성을 정할 때도 어원을 살피고 신중을 기하였다.

‘설문해자’에서 증언하듯, ‘聿(붓 율)’자에 ‘竹(죽)’을 덧붙인 ‘筆(필)’은 진(秦)나라 때 생겨난 자형이다. 그 이전엔 ‘竹’이 없는 ‘聿’의 자형이었는데, ‘聿(율)’을 고대 조선과 접경국이었던 연(燕)나라에서도 ‘弗(붇)’이라 말했다는 ‘설문해자’의 설명은 매우 중요하다. 기자조선의 조상국인 은상의 갑골문자 ‘聿’은 손(又: 오른손 우)에 대나무(竹의 생략형) 붓을 붙들고 있는 모습으로, ‘붙(←붇)들다’란 말과 조선의 ‘붇(筆)’으로 미루어 볼 때, 은나라 때 ‘聿’이 ‘律(률)’의 간체자로서가 아닌 ‘붓’을 뜻할 때의 본음은 ‘뷷(→붇)’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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