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종 문화소통]세종의 정신이 깃든 훈민정음 해례본 글자체
박대종의 ‘문화소통’
세종실록 계해년 음력 12월30일(양력 1444년 1월19일)자 기록에선 “이달에 주상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창제하였다”고 밝혔다. 여기서 ‘이달’이란 양력으로는 1443년 12월21일부터 1444년 1월 19일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2020년 4월15일자 <통일 후 ‘훈민정음 창제 기념일’에 대한 제언>에서 밝힌 것처럼, 1444년 1월6일 세종대왕은 정인지 등과 대면한다. 그날부터 1월13일 사이에 세종은 자신이 직접 쓴 ‘훈민정음 예의(例義) 간략본’을 정인지 등에게 보여주며 훈민정음 28자에 대해 설명한다. 그때의 상황에 대해 정인지는 해례본 후서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계해년 겨울(1444년 1월)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고는, 신하들에게 그 용례와 뜻들을 간략히 들어 보이며, ‘훈민정음’이라 명명했다. 그리고는 그 간략본에 보다 상세히 해석을 가한 번본을 작성하여 여러 사람들을 깨우치도록 명하셨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444년 양력 3월5일, 세종은 최항·박팽년·신숙주·이선로·이개·강희안 등에게 언문으로써 ‘운회(韻會)’를 번역하라고 명한다. 그 일을 제대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훈민정음의 상세 설명서인 해례본의 시급한 완성과 반포가 선행돼야 한다. 따라서 세종은 당연히 반포를 위해 관련 작업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집현전의 최만리 등에겐 훈민정음 해례본 반포를 목표로 일을 서둘러 추진하려는 왕의 의지가 불편했다. 운회의 번역 명령이 있은 날로부터 4일 뒤인 1444년 3월 9일, 최만리·신석조·김문·정창손·하위지·송처검·조근은 상소를 내어 세종께 고언했다. “이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널리 채택치도 않고 갑자기 관아의 구실아치 10여 인으로 하여금 언문을 익혀 읽는 것을 훈련케 하며, 인쇄기술자 수십 인을 모아 목판을 새겨 급하게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천하 후세의 공의에 어떠하겠나이까?” 놀랍게도 세종은 그 고언을 수용하여 1444년에 해례본을 반포하려던 방침을 철회하였다. 2019년 10월15일자 <세종대왕이 꿈속에서 지은 시>에서처럼 국가의 많은 경사들은 왕이 처신을 신중하게 하는 데서 비롯됨을 명심하고 일처리에 신중을 기했다. 더욱 심혈을 기울인 끝에, 마침내 1446년 9월30일 무렵 훈민정음 해례본이 완성됐다. 해례본에 쓰인 낱글자로써의 ‘ㅇ, ㅁ, ㅂ, ㅎ’ 등에는 세종의 표기 규칙이 담겨있다. <사진2>에서처럼 국보 제70호 간송해례본 중 진품인 해례편 18장을 보면, ‘ㅁ’의 가로와 세로 길이는 ‘ㅂ, ㅇ’과 완전 일치한다. 그러나 1940년에 이용준이 손으로 쓴 앞장을 보면 ‘ㅁ’과 ‘ㅂ’의 가로·세로 길이가 달라 해례본의 진품 글씨체가 아님이 명확히 드러난다. ‘ㅇ’도 ‘ㅁ’과 가로 길이가 다를 뿐 아니라, ‘ㅇㅎㆆ’ 속의 원은 완전한 동그라미가 아니며 ‘ㅎㆆ’의 가로선은 기울어져 있어 진본 훈민정음체가 아님이 드러난다.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