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 기고

[박대종 문화소통]영웅은 정음으로 서명했다…‘손긔졍’

등록 2020-11-04 06:00:00   
  • 크게
  • 작게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이메일
  • 프린트
박대종의 ‘문화소통’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 1936년 8월9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뒤 8월15일 친필로 동국정운 이래로의 정음 ‘긔’를 써서 ‘손긔졍(孫基禎)’이라 서명한 고(故) 손기정 선생의 엽서 기록. (자료=손기정기념재단 제공)
[서울=뉴시스]  손기정(孫基禎,1912~2002) 선수를 생각한다. 그는 단순한 올림픽 금메달 마라토너가 아니었다. 민족의식이 있었고 그것을 두려움 없이 실천한 자유의지의 지성인이었다. 또한 그는 ‘정음’을 잊고 사는 현대 한국인들을 세종대왕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 사람이다.

1936년 8월9일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에서 우승한 뒤, 그는 쇄도하는 사인 요청에 자신의 이름을 ‘손긔졍’이라고 썼다.

오늘날 표기인 ‘손기정’이 아닌 ‘손긔졍’이란 표기에 시선이 집중된다. 당시 낭보를 대서특필한 동아일보 1936년 8월11자 1면 기사에선 한자명 ‘孫基禎’과 지금처럼 ‘손기정’이란 한글표기를 썼다. 동아일보의 표기는 1933년도 조선어학회의 ‘한글마춤법통일안’을 따른 것이다. 물론, 우리 언론 중엔 1942년부터 1947년 6월12일자 ‘마라톤 선수 손긔졍씨의 연셜’ 기사까지 ‘손긔졍’으로 보도한 신한민보도 있었다.

중국과는 다른 우리나라 한자음에 대한 영원의 正音 작업을 완료한 세종대왕의 ‘동국정운’(1447)에 따르면, ‘孫(손자 손)’의 정음은 ‘손’, ‘基(터 기)’의 정음은 ‘긔’, ‘禎(상서 정)’의 정음은 ‘뎡’(종성은 ‘ㆁ’)이다. ‘禎(뎡)’은 영조 때 홍계희가 지은 운서인 ‘삼운성휘’(1751)에선 변음 ‘졍’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이미 그 전에 ‘ㄷ→ㅈ’으로의 변음이 이루어진 관계로 손기정은 ‘뎡(禎)’을 ‘졍’으로 쓴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세종 이래로 ‘基’자에 대해 우리말 정음 ‘긔’를 써준 손기정 선생께 감사한다. ‘孫(손자 손)’의 경우엔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말 정음 ‘손’이 유지되고 있다. ‘홍무정운역훈’에 따르면 ‘孫’의 중국 명나라 정음은 치두음(齒頭音) 초성 ‘ᄼ’을 쓴 ‘순’이었다. 비록 발음은 [하니바람]으로 하지만 아직껏 서쪽에서 부는 바람을 ‘늬’가 들어간 ‘하늬바람’이라 표기하고 있는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고맙다. 그로 인해 중성 ‘ㅢ’가 들어간 글자들을 이해하고 결국엔 정음을 다시 빛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의’와 ‘이’는 당연히 철자도 다르고 음도 다르다. 하지만 ‘의의(意義)’를 잘 발음하지 못해 지금도 ‘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 사람들도 쓸 때는 ‘의의’라 쓰지 ‘이이’라 쓰지는 않는다. 언젠가 “말소리는 변하는 거야. 그게 언어의 법칙이야” 하면서 “‘의의’를 버리고 ‘이이’로 쓰자”는 소리가 이 땅에서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의’라는 표기와 발음을 폐기하자는 공론은 나오지 않고 있다. 다행히도 지금의 선생님들 또한 아이들에게 ‘나의(my)’의 ‘의’ 소리를 정확히 발음할 수 있도록 자세히 가르치고 있다.

우리글의 표기 체계에서 중성 ‘ㅢ’가 들어간 ‘믜븨싀츼킈픠’가 공식 폐지되고 ‘미비시치키피’로 바뀐 것은 일제의 ‘언문철자법’(1930)부터이다. 그리고 ‘긔챠(汽車)→기차’, ‘일긔(日氣)→일기’처럼 ‘긔’를 버리고 대신 ‘기’를 취하여 적은 것은 조선어학회의 ‘한글마춤법통일안’(1933)에서 비롯됐다.

‘긔’가 폐지되고 ‘기’로 통일된 현 상황이 괜찮다고 보는 사람들은 ‘의’ 또한 언젠가는 폐지되고 ‘이’로 표준화돼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긔’는 바뀌어도 되지만 ‘의’ 만큼은 절대 안된다고 하면 그건 모순된 관념일 뿐이다. 일부 사람들의 발음이 ‘기’로 변했더라도 ‘긔’ 표기가 살아있으면, 우리는 ‘의’ 발음을 응용하여 ‘긔’를 정확히 발음할 수 있다.

동국정운에 따르면 ‘基(터 기)’의 구성자인 ‘其(그 기)’자 또한 우리말 정음은 ‘긔’이다. 홍무정운역훈에 의하면 ‘基’와 ‘其’의 중국 명나라 정음은 ‘계’였다. 우리나라 남도 지방 사람들 상당수는 ‘나의’의 발음이 어려워 ‘나으’로 소리하는 경향이 있다. 또 ‘의의(意義)’를 ‘이이’라 발음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한 현상처럼 ‘其’의 정음 ‘긔’에서 ‘기’와 ‘그’ 두 음이 분화된 것이다. 다시 말해, ‘그(it)’라는 말은 ‘其’자의 우리말 정음 ‘긔’의 변음이다.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heobulan@naver.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이메일
  • 프린트
  • 리플
텝진으로 위클리 기사를 읽어보세요
위클리뉴시스 정기구독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