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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정의 寫讌] 나는 화마를 잠재우는 하백의 딸입니다

등록 2017-07-15 05:50:00   최종수정 2017-07-18 09: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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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서울 광진소방서 화재진압대원 주현진 소방사, 동대문소방서 화재감식대원 이현숙 소방장, 강동소방서 구급대원 김선희 소방장, 송파소방서 상황관리대원 정소리 소방사.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조수정 기자 = “삐~ 화재 출동, 화재 출동”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정적을 깹니다. 여성 소방관 4명을 각각 근무하는 소방서에서 인터뷰하기로 했는데 도중에 두 명이 출동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사진 촬영을 먼저 한 뒤 저는 카메라를, 대원은 방화복 등 장비를 정리하고 여성 대원 대기실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는데 한참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헐레벌떡 달려온 대원은 긴 머리를 질끈 묶고 기자 앞에 다시 섰습니다.
 
 다른 대원은 인터뷰하다 급히 출동하게 됐습니다. 이미 한 차례 대기실에 혼자 남은 적 있었던 저는 ‘따라가야겠다’ 싶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따라나서면 저는 짐이 될 게 뻔하니까요.
 
 그렇다면 나머지 두 대원과 만남은 편했을까요. 아닙니다. 비록 출동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들의 몸은 제 앞에, 마음은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글은 땀의 기록, 생사(生死) 갈림길의 보고서입니다.

 #1. 서울 광진소방서 화재진압대원 주현진(28) 소방사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소방관인 아버지를 닮고 싶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강남소방서 주종옥 행정팀장입니다.

 예상치 못한 화재 현장에는 위험이 도사립니다. 선두에 선 진압대원들이 현장에 진입하기 위해 유리창을 깰 때 아래층에서 소화 장비를 전달하던 주 대원의 머리 위로 커다란 유리 조각들이 떨어져 급히 피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아직 신참인 주 대원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주의해야 할 현장을 몸으로 배웁니다.

 소방관이 아닐 때는 몰랐습니다. 화마(火魔)의 침탈이 시도 때도 없다는 것을. 하루에 큰불이 세 차례나 발생한 적도 있었습니다. ‘생각했던 것과 아주 다르다’는 선배들의 조언을 이제야 실감합니다. 초심을 잃지 않는 소방관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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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주현진 서울 광진소방서 화재진압대원이 탱크차에 연결된 관창을 들고 있다. [email protected]

#2. 서울 동대문소방서에서 화재 감식 업무를 맡은 이현숙(42) 소방장입니다. 화재 감식부터 통신, 예방 민원까지 15년 차답게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지금도 과학적인 조사를 위해 공부합니다.

 서울 23개 소방서 중 화재 감식을 담당하는 대원은 총 69명, 그중 여성 대원은 4명입니다. 여성이 화재 감식을 하게 된 것은 지난 2014년부터입니다. 한때 여성 소방공무원을 두고 ‘남자도 힘든 직업인데 여성이 어떻게 하냐’는 시선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구조를 제외한 구급, 지휘, 홍보 등 모든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심하게 훼손된 시신과 중증 부상자들과 자주 마주하며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여전히 낯설고, 벅찹니다.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화재가 발생한 가정의 집을 고쳐주는 봉사도 합니다. 소방서에는 저소득층 등 소외계층 가정에 반소(半㶮) 이상의 화재가 발생하면 화재 피해 복구를 돕는 제도가 있습니다. 집을 고쳐드린 피해 가정에서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고, 소방서로 직접 찾아와 고마움을 표현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도 큰 보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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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이현숙 서울 동대문소방서 화재감식대원. [email protected]

#3. 18년 차 소방공무원인 서울 강동소방서 구급대원 김선희(41) 소방장입니다. 대학에서 응급 구조학을 전공했습니다.

  현장은 늘 긴박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이 많이 발생합니다. 저혈당으로 쓰러진 할머니를 조치해달라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는데 아내가 쓰러진 것을 보고 놀란 할아버지마저 심장마비로 쓰러져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두 어르신을 모두 병원으로 이송했습니다. 꺼져가는 생명을 붙들고, 온기를 불어넣는 것은 일상이 됐습니다.

  단거리 달리기를 좋아해 강동구 여성축구단 선수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포지션은 풀백입니다. 소방공무원은 체력 관리가 필수니까요. 올해 전국대회 1부리그에서 3위를 차지했습니다.

  소방관은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고, 생명을 살리는 직업입니다. 제 아이들은 학교 선생님께 엄마처럼 멋있는 소방관이 되고 싶다고 했답니다. 어깨가 절로 쭉 펴지고 힘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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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김선희 서울 강동소방서 구급대원. [email protected]

#4. 송파소방서에서 상황관리 업무를 담당하는 정소리(27) 소방사입니다.

소방관이 되기 전 등산 중 낙상사고를 당한 부상자를 발견해 구급차를 부른 적이 있습니다. 응급조치 후 구급대에 인계 후 가슴 벅찬 뿌듯함에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아,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구나' 소방관이 될 운명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상황관리는 특성상 큰불이 났을 때만 출동합니다. 최근 문정동 한 아파트 화재현장에 출동했습니다. 당시 주민들이 아파트 난간에서 손을 흔들고 구조를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현장에서 요(要)구조자의 인원, 화재의 규모 등을 파악한 뒤 상황판에 정리해야 합니다. 제가 적은 이 상황판을 토대로 현장 지휘가 이뤄지고, 취재진에게 관련 정보가 전달됩니다. 초기에 진화되고 구조된 주민들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화재 진압팀에 근무할 당시, 관창을 들고 선두에 서고 싶었지만, 현장은 녹록지 않습니다. 완전 진화 후 진입해도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뜨겁습니다. ‘혹시 내가 일을 잘 못 하는 것은 아닌가’ 고민이 많을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화재 현장에서 벌어지는 전 과정을 제가 직접 확인하고, 전달하며 보람과 자부심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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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정소리 서울 송파소방서 상황관리대원. [email protected]

 국내 소방공무원은 2017년 6월 말 기준 총 4만2987명, 그중 여성은 3419명입니다. 여성 비율은 7.9%입니다. 큰 비율을 차지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1982년 여성 구급대원 특채, 2001년 여성 화재 진압(경방) 대원 채용, 2014년 여성 대원 화재 감식 투입 등 영역을 넓혀온 것은 고무적입니다.

 생명을 구하는 일을 천직으로 믿는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직업에 자부심이 깃들어 있습니다. 두려움과 맞설 용기를 지닌 이들은 여성이 아닌 소방관입니다. 화마를 잠재우는 하백(河伯; 물의 신)의 딸입니다.

 <조수정의 사연(寫讌)은 사진 '사(寫)', 이야기 '연(讌)', '사진기자 조수정이 사진으로 풀어놓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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