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 국제일반

흔들리는 신흥국 경제…외환위기 도미노 현실화되나

등록 2018-08-26 05:00:00   
  • 크게
  • 작게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이메일
  • 프린트

1990년 대 후반 아시아 외환위기가 유사 상황 우려 제기

associate_pic
【앙카라(터키)=AP/뉴시스】터키 수도 앙카라의 한 환전소에서 지난 10일 한 남성이 환전을 마치고 환전소를 떠나고 있다. 터키에서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경제정책과 미국과의 무역 마찰에 대한 우려로 리라화가 폭락하면서 리라화 가치는 연초 대비 66%나 떨어졌다. 터키 중앙은행은 13일 리라화 폭락에 따른 금융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은행들의 지급준비율을 낮추고 유동성 공급을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2018.8.13

【서울=뉴시스】 안호균 기자 = 터키발(發) 외환위기의 공포가 다른 신흥국들로 확산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신흥시장으로 몰려들었던 글로벌 투자자금이 이제는 반대로 미국 등 선진국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다. 일각에서는 1990년대 후반 아시아 외환위기와 같은 사태가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 10일(현지시간)부터 13일까지 터키 리라화가 미국과의 갈등으로 20% 가까이 폭락하자 외환위기의 공포는 다른 신흥국 금융시장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리라화 폭락 사태 이후 일주일 동안 아르헨티나 페소(-5.40%), 남아프리카공화국 랜드(-6.98%), 멕시코 페소(-1.53%), 브라질 헤알(-2.66%), 인도 루피(-2.10%), 콜롬비아 페소(-3.61%) 등 취약 신흥국 화폐 가치가 동반 하락했다.

 신흥 시장의 불안은 올해 들어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연준·Fed)가 긴축에 가속도를 내면서 시작됐다. 금융위기 이후 빠르게 부채를 늘려온 신흥국 경제가 미국의 금리 인상기를 맞아 침체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MSCI 신흥시장지수는 1월 고점 대비 20% 이상 하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흥국 금융시장은 터키 사태와 같은 외부 충격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이다.

 현재 세계 경제 상황이 아시아 외환위기가 벌어졌던 1990년대 후반과 유사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지난 13일 자신의 트위터에 "터키 금융위기는 1998년 인도네시아, 태국 등에서 발생했던 위기를 재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외국 대출기관이 한 국가를 매력적인 투자처로 인식하면, 엄청난 해외자본이 수년간에 걸쳐 유입된다"며 "그러면 국가의 부채는 자국 화폐가 아닌 외국 화폐로 표시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어떤 이유로든 해외 대출이 중단되는 일이 발생하면 그동안 쌓아온 외화부채가 경제를 죽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 들어간다"고 우려했다.

associate_pic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 AP/뉴시스】 경제위기와 인플레로 고통받고 있는 카라카스 시민들이 21일(현지시간) 공공 교통수단을 이용하기 위해 장사진을 치고 있다.  이 날 카라카스 일대에서는 규모 7.0의 강진이 발생했다.  

◇아르헨티나·파키스탄도 위기…베네수엘라·이란 경제는 붕괴 직전

 통화 가치가 하락하면 외화 부채의 상환 여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이 때문에 자국 시장에서 투자 자금이 계속 이탈에 통화 가치가 계속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올해 들어 터키 뿐만 아니라 다른 신흥국에서도 이같은 경제 불안은 끊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앞서 외환위기의 공포를 경험한 나라는 아르헨티나다. 아르헨티나 페소화는 미국의 금리 인상과 신흥시장 경제 위기에 대한 공포로 올해 들어 37%나 급락했다. 아르헨티나는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금리를 3차례에 걸쳐 12.75%나 올리고도 금융 불안이 해소되지 않자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내밀었다. IMF는 6월 아르헨티나에 3년간 5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파키스탄도 13번째 IMF 구제금융 신청 가능성이 제기될 정도로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 파키스탄 루피화 가치는 올해 들어 10% 넘게 하락했다.  외환보유액은 95억 달러 수준으로, 두달도 채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 때문에 파키스탄정의운동당(PTI)의 임란 칸이 이끄는 새 정부가 100억~120억 달러 수준의 구제금융을 신청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일부 산유국들은 미국의 경제 제재로 이미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경우 외화 공급이 차단돼 자국 통화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면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다. 지난달에만 물가상승률이 8만%를 넘었고 올해 전체 물가상승률은 100만%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볼리바르화의 액면가를 10만대 1로 절하하는 화폐개혁까지 단행했지만 오히려 혼란은 커지고 있다.

 이란의 경우에도 미국이 핵협정 탈퇴 이후 리알화 가치가 70% 이상 급락했고 올해 물가상승률도 두자릿수를 넘길 것으로 전망된다. 다임러, 토탈, 푸조 등 이란에 진출했던 외국 기업들의 '엑소더스'도 가속화되고 있다. 11월 미국의 석유 금수 조치가 단행되면 이같은 경제 불안은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中, 위기 맞은 신흥국 지원군 될까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신흥국들이 경제 위기를 겪을 때 지원자 역할을 했던 IMF의 위상은 축소되고 있다. 위기를 맞고 있는 신흥국들이 대부분 IMF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과 갈등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IMF 구제금융 체제에 들어갈 경우 경제 정책에 상당한 간섭을 받게된다는 점도 신흥국들이 지원 요청을 꺼리는 요인이다. 터키와 파키스탄 등은 외환 위기 상황 속에서도 IMF 구제금융 신청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가 점점 심화되는 상황에서 신흥국들은 다른 대안을 찾고 있다. 미국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한 중국이 지원군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과 620억 달러 규모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을 진행 중인 파키스탄의 경우 IMF 대신 중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란도 미국의 제재로 석유 수출길이 막힐 경우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더욱 높일 것으로 예상된다. 터키도 최근 중국 공상은행으로부터 36억 달러 규모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중국의 역할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20일 "중국에 의존하는 취약 신흥국의 경제 구조는 부채를 더욱 증폭시킬 우려가 있다. 중국 국영기업에 항구를 인도한 스리랑카 사태가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며 "금융위기 당시에는 미국과 유럽이 전면에 나서 G20을 중심으로 세계경제 질서가 확립됐지만 현재는 공조의 리더십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중국 경제가 다른 신흥국들을 든든하게 지원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정적인 상황도 아니다. 성장 둔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무역 공세까지 더해져 중국 시장에서는 자금이 계속 빠져나가고 있다. 올해 들어 상하이종합지수는 20% 넘게 떨어졌고, 위안화 가치는 5% 가까이 하락했다. 국내총생산(GDP)의 300%에 달하는 부채도 잠재적인 불안 요인이다.

 국제금융센터는 미중 무역분쟁이 장기화될 경우 대중(對中) 무역 비중이 높은 말레이시아(29%), 태국(19%), 한국(18%), 칠레(13%), 남아프리카공화국(11%) 등의 경제도 취약성을 드러낼 수 있다고 진단했다.

associate_pic
【홍콩=AP/뉴시스】터키 리라화 사태 폭락으로 13일 아시아 증시들도 일제히 하락했다. 13일 홍콩의 증권회사 앞 전광판에 항셍지수가 1.60% 하락한 것으로 표시돼있다. 2018.08.13

 ◇무역전쟁·美금리인상 등 리스크 산적…위기 전이 우려 커져

 리라화 폭락 사태가 다소 진정되는 양상이지만 아직 신흥국 경제 불안을 자극할 만한 요인들은 산적해 있다. 터키에 억류된 미국인 목사 앤드루 브런슨의 석방 문제를 놓고 양국간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있어 터키 경제가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보긴 어렵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에 대한 위협도 여전히 남아 있다. 또 미 연준이 9월과 12월 잇따라 금리를 올릴 것으로 예상돼 신흥시장에서의 자금 이탈이 가속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현재 일부 신흥국들의 경제 상황이 외부 충격에 매우 취약한 상황이어서 언제든 위험이 여러 나라로 전이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로버트 수브라만 노무라 신흥시장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13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외화 부채 규모와 경상수지 적자 규모가 큰 남아공, 홍콩, 필리핀, 칠레, 멕시코를 외환 위기에 가장 취약한 신흥국들로 꼽았다. 그는 "리스크의 감염 위험은 매우 높다"며 "초저금리로 인해 투자자들은 올해까지 신흥시장에서 수익률을 추구해 왔다. 터키는 신흥시장에서 확대되고 있는 도전의 징후"라고 말했다.

 [email protected]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이메일
  • 프린트
  • 리플
위클리뉴시스 정기구독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