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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업 필름]수렁에서 구원해낸 내 이름 '정순'

등록 2024-04-17 06:02:00   최종수정 2024-04-29 09: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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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영화 '정순'(4월17일 공개)은 조수석에 탔던 여자가 운전석에 타면서 끝난다. 조수석에선 무기력해보이던 그는 운전석으로 옮겨 앉자 생기를 띈다. 누군가에 의해 실려 가는 것과 직접 핸들을 잡고 엑셀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으며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게 같을 순 없다. 운전대를 넘겨줬을 땐 원하는 곳에 도착시켜 줄 거라는 기대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운전을 할 땐 모든 게 내 의지다. 방향도, 속도도, 끝까지 갈지 중간에 멈출지 혹은 다시 돌아올지도. 그러니 설령 도착한 장소가 같더라도 마음이 도달한 곳은 같지 않다. 그 모진 일을 겪은 정순이 일상을 되돌리며 먼저 하는 일이 운전 면허 획득이라는 건 그래서 숭고하다. 그는 이제부터라도 삶의 주도권을 쥐길 원한다. '정순'은 불법 촬영·유포 피해자에 관해 얘기한다. 다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모든 여성을 향해 얘기한다. 삶의 운전대를 붙잡으라고.

정지혜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인 '정순'이 핵심 사건을 보여주기에 앞서 식품 공장 직원 정순의 일상을 공들여 보여주는 건 의도적이다. 만약 이 영화가 불법 촬영·유포 피해에 집중하려 했다면, 그 사건을 극 초반부에 전진 배치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 감독이 하려는 일은 성폭력 피해자가 다시 일어서는 과정에 그치지 않는다. '정순'은 영상 속에서 속옷만 입고 춤을 추는 여성으로 대상화된 한 인간이 존엄을 되찾는 과정을 그리는 것과 동시에 직장에선 이모로, 집에선 엄마로 대상화 된 존재가 자기 이름을 쟁취하는 모습을 담으려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러닝 타임 104분 중 절반 가까이를 정순이 일상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당하는 갖가지 굴욕을 과장 없이 내보인다. 그래야만 사건 발생 이후 긴 침묵을 깨고 나온 정순이 집에서, 공장에서 차례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게 합당한 귀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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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은 가장 소외돼 있을지 모르는 성(性)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약자의 위치로 떨어질지 모르는 모든 여성을 지지하려 한다. 젊은 여성의 성보다 중년 여성의 성을 쉽고 가볍게 그리고 시급하지 않게 취급하는 현실에서 이 작품이 결혼을 앞둔 딸이 있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엔 특별한 확장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 어쩌면 자기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사회 보호 바깥에 있게 된 여성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이름을 바로 세우려는 그 안간힘은 거룩해 보이기까지 하다. 중년 남성이 무너진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애인을 수렁에 처박는 일 밖에 하지 못할 때 정순은 그 깊고 깊은 구덩이를 혼자 힘으로 빠져 나와 진흙을 뒤집어 쓴 자신을 당당히 내보이며 스스로 구원하고 있지 않나. 그렇게 '정순'은 정순을 넘어서 다른 이름들도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한다.

자신만의 시각과 비전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정지혜 감독은 주목해야 하는 작가이자 연출가다. 안 그런 독립영화가 없겠지만, 예산 문제 등 열악한 촬영 환경과 제한된 시간 안에 이같은 성취를 이뤄냈다는 건 특기해야 할 재능이다('정순'은 최저 수준 예산으로 15회차 촬영으로 완성됐다). 이걸 가능하게 한 건 정교한 각본이다. 목표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 짜인 구조가 정확하고, 대사를 해야 할 때와 하지 않아야 할 때는 구분한 판단이 예리하며, 대사 한 줄 쇼트 하나를 낭비하지 않으려는 시도에선 야심이 엿보인다. 긴장감을 끌어올려야 할 때와 강렬한 충격을 전달해야 할 때를 균형감 있게 다루는 연출 역시 첫 장편영화처럼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정순'을 완벽에 가까운 영화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그래도 정 감독 차기작에 향한 기대감을 갖게 하기엔 충분한 결과물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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