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립 잡기노트]차경석 보천교, 과연 사이비였나
1946년 6월3일 대통령 이승만이 전북 정읍을 방문,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것이 ‘정읍 발언’이다. 중차대한 사안을 서울이 아닌 정읍에서 언급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승만의 정치적 라이벌인 김구도 “정읍에 빚을 많이 졌다”고 했다. …. 당시 정읍에는 보천교(普天敎)라는 종교가 있었다. 동학운동 접주 차치구의 아들인 월곡(月谷) 차경석(1880~1936)이 창종, 600만 신도를 거느리며 위세를 떨쳤다고 한다. 보천교는 일제강점기에도 광화문을 그대로 본떠 본거지인 정읍 대흥리를 도시 계획했다. 자급자족을 위해 상공업에 힘쓰는 등 나라 잃은 민족은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보천교는 비폭력주의를 내세웠다. 친일집단 취급을 받은 이유다. 차경석은 그러나 독립운동의 든든한 자금줄이었다. 문제는 증거사료다. 극도의 보안 속에 돈을 전달한 탓에 기록 대신 증언만 전해질 따름이다.
전혀 다른 견해도 나오고 있다. 보천교와 독립군의 연결고리를 탐지한 총독부가 보천교와 민중을 이간, 탄압하다가 차경석을 독살하고 보천교를 와해시켰다는 새로운 연구결과다. 차경석은 단순종교 이상인 보천교로 민족해방운동을 돕고, 독립운동의 보이지 않는 구심점이 되려 했다는 것이다. 민족 정체성을 고취하고 종교운동 측면에서 민중운동의 길을 찾았지만, 일제의 와해공작으로 뜻을 펴지 못했다고 본다.
무너진 보천교의 본당인 십일전(十一殿)은 조계사 대웅전의 기둥, 내장사의 전각 등으로 재활용됐다. 십일전 청기와는 총독부 지붕으로 올라갔다. 청와대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기왓장들이다. 보천교와 함께 몰락한 교주 차경석의 묘는 돌보는 사람이 없다. 잡초만 무성할 뿐이다. 차경석의 맥이 전쟁영웅인 경무관 차일혁(1920~1958)으로 이어졌다는 점도 특기해야 한다. 편집부국장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