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부르는 데이트 폭력①]'사랑'아닌 '범죄'…5년간 467명 목숨 잃어
경찰, 112신고 '데이트 폭력 코드' 신설 【서울=뉴시스】박성환 기자 = 남의 일이라고 모른 척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닙니다. 편견. 그동안 차마 피했던 말,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든 이 말 앞에 우리는 침묵합니다. 편견은 중요한 것을 사소한 것으로 변하게 합니다. 심지어 판단의 경계마저 흩트려놓습니다. 어느 정도인지 짐작되고도 남습니다. 편견은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여성에 대한 판단을 송두리째 흩트립니다. 한때 정을 나누고, 사랑했던 연인이 가하는 '데이트 폭력'에 대해 더욱 그러합니다. 편견은 단지 피해자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입 다물게 합니다. 아프다고, 힘들다고 하소연조차 쉽게 허락지 않습니다. 하물며 도움을 바라는 것은 어림도 없습니다. '지배와 통제는 남자의 몫이고, 복종과 순종은 여자 몫'이라는 편견. 데이트 폭력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어찌 말로 표현하겠느냐마는 '여자가 행실이 안 좋아서 그런 일을 당한다'는 은연 중 드러난 우리 사회의 낡아빠진 편견입니다. 피해자를 옴짝달싹 못 하게 해놓고 들이미니 해괴한 논리입니다. 분명 여성이 피해자인데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막막한 공포에 떨어야 하고, 말해 본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극심한 공포에 놓인 채 그저 자신이 당한 고통을 홀로 삭이라고 강요합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이별 요구를 하는데 목숨까지 담보로 걸어야 합니까?" 이 물음에 돌아온 말은 "여자가 행실이 안 좋아서 그런 일 당한다"였습니다. 작정하고, 욕지거리 한 마디 내뱉고 싶으나 이를 악물고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너나 잘하세요." ◇헤어지자는 연인, 마구 때리고 감금·협박 #.1 서울 강남 주택가에서 30대 여성이 전 남자친구로부터 무참히 살해당했다. 여성이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경찰의 안이한 대응으로 끔찍한 상황을 막지 못했다. 경찰에 따르면, 지난 1월9일 오후 5시30분께 서울 강남구 논현동 한 빌라 주차장에서 이모(35·여)씨가 피투성이가 된 채 발견됐다. 목격자 신고로 병원으로 이송된 이씨는 두개골이 완전히 골절됐다. 혼수상태에 빠졌던 이씨는 사흘 뒤 숨졌다. 이씨를 살해한 사람은 다름 아닌 전 남자친구 강모(33)씨였다. 그는 사건 당일 헤어져 달라고 요구한 이씨를 주먹과 발로 마구 때린 뒤 태연히 범행 현장을 떠났다. 두 사람은 재작년 12월부터 범행 현장인 빌라에서 1년간 함께 살았다. 강씨는 동거하는 동안 이씨를 상습적으로 폭행했다. 폭행을 목격한 이웃도 있었다. 강씨의 지속적인 폭력을 견디다 못한 이씨는 지난해 12월 이별을 통보했다. 이후 강씨는 빌라에서 짐을 뺐지만, 이씨에게 다시 만날 것을 계속 요구했다. 수차례 거절이 계속되자, 화가 난 강씨는 사건 당일 오후 2시30분께 이씨가 사는 빌라에 찾아와 심한 욕설을 하며 '한 번만 만나자'고 요구했다. 이씨가 문을 열어주지 않자 강씨는 예전에 알고 있던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침입했다. 이에 이씨는 곧장 112에 신고했고, 출동한 경찰은 강씨를 연행했다. 하지만 경찰은 두 사람이 1년간 동거한 사실을 확인하고, 강씨에게 '다시는 이씨 집에 가지 마라'고 경고한 뒤 풀어줬다. 강씨는 경찰서에서 풀려난 지 2시간 만에 다시 이씨 집을 찾았다. 이씨를 빌라 주차장으로 불러낸 강씨는 다시 만날 것을 거듭 요구했다. 경찰은 이튿날 강씨를 살인 혐의로 체포했다. 강씨는 경찰 조사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는데, 거절당해 홧김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2 내연녀를 감금하고, 폭행한 현직 교사가 구속됐다. 유부남이었던 현직 교사는 총각 행세를 하다 들통 난 뒤 이별 통보를 받자 이 같은 짓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1월18일 오전 5시15분께 고등학교 현직 기간제 교사였던 김모(31)씨는 서울 강서구 마곡동의 내연녀가 사는 오피스텔에 찾아갔다. 김씨는 내연녀가 문을 열어주지 않자 현관문 안전 고리를 부수고 집으로 들어갔다. 김씨는 피해 여성을 흉기로 위협하며 20분 동안 감금한 채 얼굴을 마구 때렸다. 경찰 조사 결과 김씨가 유부남인 사실을 뒤늦게 안 피해 여성이 이별 통보를 하자, 화가나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피해 여성이 김씨의 협박에 못 이겨 출동한 경찰을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경찰이 현장을 떠나지 않아 범행 사실이 드러났다. 피해 여성은 코뼈에 금이 가는 등 전치 3주 상해를 입었다. ◇순식간에 돌변한 '연인'…신체 훼손부터 살인까지 연인으로부터 폭행당하는 이른바 '데이트 폭력'이 끊이지 않고 있다. 데이트 폭력은 연인이거나 연인이었던 남녀관계에서 발생하는 신체적, 정신적, 언어적, 성폭력 등을 말한다. 데이트 폭력은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연인의 개인 생활을 간섭하거나 구속하려는 과정에서 자주 발생한다. 데이트 폭력은 갑자기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 증거 수집이 어렵고, 보폭 폭행 등 2차 피해가 두려워 피해를 보고도 선뜻 신고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최근에는 데이트 폭력 수법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단순 폭행에서 상해나 살인 등 강력 범죄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렵게 헤어지더라도 2차 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수시로 다시 만날 것을 요구하거나 심지어 헤어진 연인의 은밀한 사진이나 동영상을 인터넷에 유출하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때 연인 사이라도 빗나간 애정은 끔찍한 결과를 낳고 있다. 데이트 폭력으로 연인 사이에서 하루아침에 끔찍한 범죄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돌변한다. 지난해에는 30대 남성이 자신의 청혼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여자 친구의 신체 일부를 훼손하는 일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지난 5년간 데이트 폭력으로 467명 목숨 잃어 연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범죄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 속에 데이트 폭력 신고 건수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실제 '헤어지자'는 이별 통보가 범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5년 동안 연인 사이에 데이트 폭력을 당했다며 상대방을 신고한 신고자가 무려 3만 명이 넘는다. 경찰청에 따르면, 데이트 폭력 검거 인원은 2012년 7584명에서 2013년 7237명, 2014년 6675명으로 줄어드는 듯했으나 2015년 7692명으로 급증했다. 지난해에는 무려 8367명이 형사 입건됐다. 살인뿐 아니라 폭행이나 감금, 납치, 특수 폭행 등 강력 범죄도 빈번하다. 같은 기간 데이트 폭력으로 인한 상해 사건은 1만3252건이었고, 검거된 사람이 2만8453명에 달한다. 또 흉기 등을 이용한 특수 폭행은 5687건을 집계됐다. 특히 연인 사이에 일어나는 강간 사건도 매년 500건이나 된다. 데이트 폭력 범죄 특성상 보복이 두려워 신고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을 감안하면 피해자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 112 '데이트 폭력' 코드 신설… 현장 대응력 강화 현재 데이트 폭력을 예방할 수 있는 관련 법안이 사실상 없는 실정이다. 현행법상 술 취한 사람이나 정신이상 등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신체에 위해를 가할 우려가 있을 때만 분리 조치하게 돼 있다. 또 지난해 9월부터 시행 중인 가정폭력방지법에는 '법률적 가족관계'로 제한하고 있고, 연인 사이나 헤어진 연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데이트 폭력 사건에 이 법을 적용하는 게 쉽지 않다. 지난해 2월 박남춘 더불어민주당 의원(인천 남동구갑)은 데이트 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 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에는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의 재량에 따라 가해자를 격리할 수 있는 '긴급 임시조치' 규정이 포함됐다. 하지만 이 법안은 제대로 심의되지 못한 채 19대 국회가 종료되면서 자동으로 폐기됐다. 경찰은 데이트 폭력이 갈수록 흉포화함에 따라 특별 대책을 내놓았다. 피해자 보호를 위한 현장 대응 능력 강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 경찰은 우선 112신고 시스템에 '데이트 폭력' 코드를 신설했다. 신고를 받은 경찰관이 사전에 데이트 폭력 사건임을 미리 인지할 수 있도록 위한 조치다. 또 출동 경찰관이 가해자에게 형사처분 여부와 관계없이 서면 경고장을 발부할 수 있도록 했다. 경찰이 주시하고 있고, 처벌될 수 있음을 인식시켜 불법행위를 자제하도록 유도한다는 취지다. 경찰은 가해자가 흉기를 사용하거나 재발사건일 경우 지역 경찰뿐 아니라 형사·여성청소년수사팀 등 수사전담반이 동시에 현장으로 출동하도록 했다. 강력 범죄로 이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다. 아울러 피해자 보호 조치도 강화했다. 보호시설 연계를 비롯해 신변 경호, 주거지 순찰 강화, 위치추적장치 대여, 폐쇄회로(CC)TV 설치 등 각종 신변 보호제도와 지원기관, 담당 경찰관 연락처를 기재한 안내서를 배부해 상세히 설명하도록 했다. 현장에서 종결한 사건도 TF팀이 현장 조치 결과를 재검토한 뒤 피해자에게 전화나 문자 등으로 보호제도를 안내할 예정이다. 추가 피해 예방을 위해 가해자에게는 전화, 문자 등으로 재차 경고하거나 필요한 경우 출석도 요구한다는 방침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데이트 폭력은 재발 방지와 피해자 보호에 중점을 두고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며 "데이트 폭력은 강력 범죄로 변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발생 초기에 신고해달라"고 말했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