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규 "연기는 꽤 괜찮은 '가짜놀음'이죠"
한석규는 살아오면서 느낀 자신의 일에 대한 철학을 이렇게 풀어놨다. 지난 17일 오전 서울 삼청동 인근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연기의 신'이라고 불리는 한석규이지만 자신의 연기에 대해 그동안 느꼈던 아쉬움을 표했다. "전에는 제가 연기하는 게 꼴보기 싫었어요. 눈이 '멍 때린다'고 해야 하나. 이제 그나마 좀 눈에 뭔가 사연이 담겨 보여요. 마흔은 넘어야 하는 것 같아요." 자신이 출연한 영화 속 연기에 대해서도 "3년 정도 지나봐야 그 영화가 쓸 만한가, 아닌가 생각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영화 '상의원' 속 자신의 연기에 대해서는 '55점짜리'라고 점수를 매겼다. 자신의 영화 중 가장 높은 점수를 줄 만한 영화로는 '8월의 크리스마스'를 꼽았다. "이번 영화 '프리즌'도 3년이 지난 다음에 혼자 점수를 매겨보게 되겠죠"라고 덧붙였다. "젊었을 때는 뭘 해낸다는 것에 꽤 많이 정신이 팔려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별 것 아니구나 싶었죠. 나이를 먹고 주변사람의 죽음 같은 것을 보기도 하면서 생각이 달라지는 것 아니겠어요? 이제는 뭐가 되든 말든 그건 상관 없고 계속 한다는 게 중요한 거죠.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참 복이 많은 놈이구나' 싶죠."
"사투리를 쓰면서 연기한 적은 없거든요. 제가 완전 서울놈이예요. 사투리를 쓰면서 연기할 때는 오히려 베를린에서 영어를 쓰면서 대사하는 그런 느낌일 것 같네요." 대신에 '익호'의 캐릭터에 대해서는 다른 방식으로 연구했다. 예전에 한 과학다큐멘터리에서 본 하이에나의 세계를 떠올렸다고 했다. 모계사회로 이뤄지는 하이에나 집단에서는 수컷이 무리에서 쫓겨나 공격당하는 일이 많은데 공격당한 뒤의 그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었다는 것이다. "코가 찢기고 눈알이 빠질 정도인데도 살아있더라고요. 그러면서도 다른 무리를 찾아 나서죠. '저게 익호다' 그런 생각이었어요." 당초 제목에는 '영원한 제국'이라는 부제가 붙어있었다. 한석규는 그 제목이 더 좋았다고 했다. 그는 "이 사회에서 '익호'란 인물은 계속 등장하지 않겠느냐"며 "그런 게 나현 감독이 얘기하고 싶었던 주제였을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도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자신의 고민을 내비쳤다. 과거 몸을 다쳤을 때인 2000년대 초반 '내가 하는 연기가 다 가짜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제가 가짜를 하고 있으니 상대방도 가짜죠. 가짜의 액션을 받아쳐서 가짜의 리액션을 해야 하니까 이게 미치고 팔짝 뛰겠는 거죠. 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 상대방에 대한 리액션이 나오겠습니까. 저 사람은 더 가짜 같은데." 하지만 이제는 이 '가짜놀음'의 의미를 어느 정도 찾은 듯하다고 했다. 가짜를 통해 진짜의 이야기를 쉽게 전달하는 게 배우의 일이라는 것이다.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말해주는 것이 연기자의 역할이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이 가짜가 하는 가짜놀음이 꽤 괜찮은 거예요. 우리 직업군, 소위 문화예술이라는 일은 가짜만 갖고 하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가짜가 그렇게 나쁜 건 아니죠. 진짜를 이야기할 때 진짜로만 할 수는 없잖아요."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