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다문' 시중은행·사채권자, 대우조선 채무조정 눈치싸움
시중은행, 사채권자 입장 모호한 상황에서 합의 문서화에 신중한 입장 구조조정 열쇠 쥔 국민연금, 삼성물산 합병 찬성 전력 있어 입지 좁아 분식회계·업황 부진 등의 이유로 사채권자 동참 명분도 희석 돼 내달 사채권자집회 전까지 시중은행·사채권자간 기싸움 이어질 듯 【서울=뉴시스】이근홍 기자 = '대우조선해양 살리기'의 선결 조건인 채무조정 작업이 본격화하며 시중은행과 사채권자간 눈치싸움이 치열해지고 있다. KDB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2조9000억원의 신규자금을 투입하려면 이해관계자 모두가 채무조정에 합의해야 하는데 시중은행과 사채권자 측이 좀처럼 동의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다. 아직 명확하게 결정된 것이 없는 상황에서 정부안만 믿고 섣불리 의견을 내놓기엔 향후 떠안아야 할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시중은행 설득 나선 산은 27일 금융권에 따르면 산은은 이날 KB국민은행, 신한은행, NH농협은행, KEB하나은행, 우리은행 등 대우조선에 여신을 공급한 시중은행들과 서울 여의도 본점에서 실무자회의를 가졌다. 참석자들은 회의에서 출자전환 세부 방안과 선수금환급보증(RG) 분담 비율, 여신한도 복원 등의 내용을 논의했다. 시중은행들은 지난 23일 발표된 '대우조선 구조조정 추진방안'에 따라 무담보채권 7000억원 가운데 80%(5600억원)는 출자전환하고 20%(1400억원)는 만기를 5년 연장해주기로 구두합의했다. 산은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시중은행들과의 합의 내용을 문서화할 방침이다. 산은 관계자는 "대우조선 채무조정에 대한 내용들은 시중은행들과 조율하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최종 합의안을 문서로 작성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채권은행간 공감대에도 불구하고 구두 합의 내용을 문서화하는 이유는 사채권자에 대한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대우조선은 다음달 17일과 18일 이틀 동안 5회에 걸쳐 사채권자집회를 진행한다. 내년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 1조3500억원의 채무재조정을 시도하는 데 집회의 5번 중 1번이라도 부결이 나오면 대우조선 채무재조정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 경우 대우조선 구조조정은 P플랜(사전회생계획제도·Pre-Packaged Plan)에 돌입한다. 산은은 사채권자집회가 열리기 전에 시중은행들과의 합의 내용을 문서로 남겨 대우조선에 대한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사채권자들에게 전달할 계획이다. 채무조정에 대한 시중은행들의 합의는 뒤집힐 염려가 없으니 사채권자들도 이를 믿고 따라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셈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P플랜으로 상황이 번지면 시중은행들도 충당금을 더 쌓아야 되기 때문에 조건부 구조조정안을 따라가는 게 더 낫다는 공감대가 있다"며 "단 사채권자들의 채무조정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시중은행들이 무작정 합의안을 문서화하는 것은 다소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즉 사채권자들이 채무조정에 동참한다는 보장이 있어야 시중은행들도 명확하게 합의안을 문서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우조선 구조조정 열쇠 쥔 국민연금 대우조선 채무재조정 해결의 열쇠는 국민연금이 쥐고 있다. 국민연금은 현재 대우조선 전체 회사채 1조3500억원 중 약 29%인 3900억원을 들고 있다. 특히 다음달 21일 만기가 돌아오는 4400억원의 회사채 중 40% 가량을 보유하고 있어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지면 사실상 사채권자 채무재조정은 실패로 끝난다. 집회 안건의 가결 조건은 출석 채권금액의 3분의2 이상 동의다. 집회 5번 모두 이 조건을 만족하고 동의한 채권금액도 전체 채권액의 3분의1 이상을 웃돌아야 한다. 사채권자집회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닌 국민연금의 동의가 있어야만 채무조정 합의가 이뤄질 수 있는데 상황이 좋지 않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해 최순실 게이트에 휩쓸린 국민연금은 손실 위험이 큰 대우조선 채무조정 합의에 유보적인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자구안 방안을 놓고 검토를 시작한 단계"라며 "기금의 이익을 높일수 있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도록 신중하게 검토하겠다"고 원론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삼성물산 합병 찬성에 이어 이번에도 대규모 출자전환에 나설 경우 자칫 '정부의 입김에 따라 국민 노후자금을 날려 먹고 있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며 "금융당국에서도 이러한 국민연금의 처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설득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연기금이나 사채권자들이 경제적 실질에 대해 판단해 주시면 좋겠다"고 입장을 나타냈다. 국민연금을 비롯한 사채권자들이 정부의 구조조정 방안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또다른 이유도 있다. 앞서 해운업 구조조정의 경우 업황 부진으로 인해 회사채 등급이 내려간 상태에서 투자자들이 정부의 지원 가능성만을 믿고 고금리 투자에 나섰다 피해를 본 것이지만 대우조선은 분식회계로 정확한 평가가 이뤄지지 않았다. 또 채무재조정 후 신규 자금을 투입한다고해도 향후 수주 회복이 제한적일 것으로 예측되고 있어 3년 뒤 업황 회복과 원금상환을 확신할 수 없다. 임정민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번에 정부가 제시한 채무재조정안은 형평성에 어긋나는 손실분담, 3년 뒤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업황 등의 요인으로 인해 투자자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시중은행이나 사채권자 모두 굳이 서둘러 입장을 정할 필요는 없다"며 "내달 사채권자집회 전까지는 치열한 눈치싸움이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