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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항쟁 30주년]④시위 현장 상징이던 최루탄…'살인과 희생의 역사'

등록 2017-06-08 15:52:01   최종수정 2017-06-13 08:5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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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1987년 6월 15일 서울 연세대학교에서 일어난 시위현장에서 시위진압경찰이 학생 시위대를 향해 SY-44 최루탄을 발사하고 있다. (사진=정태원 제공)(*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email protected]

 민주사(史) 중대 전환점 뒤엔 김주열·이한열 등 최루탄 희생
 이한열 사망한 1987년 최루탄 생산업체 회장이 '소득세 1위'
 경찰, 1998년 '無최루탄' 원칙 선언···생산업체들 줄줄이 도산
 폐기처분 안 하고 보유, 수출 허가 사실 밝혀져 논란 되기도

 【서울=뉴시스】 김현섭 기자 = '1960년 4월 11일 오전/ 이런 시절에도 중앙부두 물 위에 낚시꾼이 있었다/ 시체/ 썩은 시체다/ 송장이다/ 송장이다/ 하고 외쳤다/ 눈에서 뒷머리 쪽으로/ 20센티 쇳토막이 박혀 있었다 (중략)/ 마산상고 합격자 김주열이/ 경찰에게 타살된 3월/ 타살되어/ 아무도 몰래 물에 던져진 뒤/ 그 주검/ 가라앉았다가/ 그 주검에 매단 돌 풀어져/ 떠오른뒤/ 거기서 4월혁명은 시작되었다' <고은 『만인보(萬人譜)』-'김주열' 중>

 '눈물을 재촉한다(催淚)'는 한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루탄(催淚彈)을 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눈이 맵고 따가워지는 통증을 느낀다. 참가자들을 일시에 혼미한 상태로 몰아넣고 해산을 유도할 수 있어 과거 경찰의 시위진압용으로 주로 쓰였다.

 하지만 최루탄은 사실 단순한 시위진압 수단이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대한민국에게 최루탄의 역사는 곧 '살인의 역사'이자 '희생의 역사'이다. 우리 민주사(史)의 중대 전환점을 가져 온 사건은 언제나 이 최루탄에 목숨을 빼앗긴 이가 그 도화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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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1987년 6월 9일 서울 연세대학교 정문 앞, 경찰이 발사한 SY-44 최루탄에 머리를 직격당한 이한열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다. 이한열은 피격 직후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뇌사에 빠져 27일만에 숨을 거뒀다. (사진=정태원 제공)(*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email protected]

1960년 4월11일 오전 10시께.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약 한 달 전인 3월15일 마산에서 일어난 이승만정권 부정선거 항의 시위에 참여했다가 행방불명된 고등학생 김주열(당시 17세)군이었다.

 김군의 사진은 당시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처음 촬영했고 AP통신을 통해 전 세계로 타전됐다. 그리고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27년 뒤인 1987년 6월9일. 국민평화대행진(6·10대회)를 하루 앞둔 이날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에는 학생 1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연세인출정결의대회가 열렸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함성 속에 'YONSEI'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한 남학생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통수를 직격 당한 연세대 경영학과 이한열(당시 22세)씨였다.

 신촌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같은 해 7월5일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6·10항쟁의 기폭제가 됐고 전두환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약속하는 '6·29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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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뉴시스】 1987년 5월 15일 광주 전남대학교에서 일어난 시위 도중 참가 학생의 얼굴 왼편에서 최루탄이 폭발한 모습. (사진=정태원 제공)(*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email protected]
이한열씨가 최루탄에 쓰러진 1987년. 이 해의 국내 소득세 1위가 굴지의 대기업도 아닌 최루탄 생산업체 회장이었다는 건 쓴웃음을 부르는 사실이다.

 민주화 열기가 거셌던 80년대 초반 '최루탄 산업'은 최고의 호황기를 맞았다. 그만큼 '쏴 댈 일' '쏴 댈 곳'이 많았다는 의미이다.

 1975년부터 최루탄 개발에 들어간 삼양화학공업 한영자 회장은 1987년 소득세로 28억7800만원을 납부해 1위에 올랐다.  

 이한열씨 사건은 최루탄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드는 계기가 됐다. 그의 죽음 이후 집회·시위 현장에서의 최루탄 사용이 지속적으로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경찰은 결국 1998년 '무(無)최루탄' 원칙을 천명했고, 80년대 '시위 바람'에 편승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던 최루탄 생산 업체들은 줄도산을 맞았다.

 이후 경찰은 쓰지도 않는 최루탄 수십만 개를 보유해 온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지난 2010년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가 경찰청에 요청한 자료에 따르면 경찰은 당시 최루탄 73만여개를 보유 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무최루탄 원칙을 선언한 후에도 최루탄을 폐기처분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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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1987년 6월 18일 열린 시위현장에서 대학생들이 "최루탄 쏘지마"라고 쓰여진 피켓을 들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학생은 최루가스로부터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비닐랩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다. (사진=정태원 제공)(*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email protected]
서울경찰청이 2012년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박남춘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그 해 9월 기준으로 서울 관내 경찰서, 기동대 등에 최루탄 14만8851발이 보관돼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2015년 국정감사에서는 경찰이 최루탄 수출 허가를 내 준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당시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의원은 경찰청 국감에서 "경찰이 지난해(2014년) 이후 수출을 허가한 최루탄 물량이 400만 발, 2700만 달러 상당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정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14년 최루탄 수출량은 총 19개국에 200만2451발, 560만 달러 상당이다. 2015년 7월까지는 12개국에 196만7561발, 2100만 달러를 수출했다.

 이 중 무려 77%가 터키에 수출이 됐는데, 2014년 터키 이스탄불 시위 현장에서는 경찰이 쏜 최루탄에 빵을 사러 다녀오던 15세 소년이 맞아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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