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정의 寫讌] 갯벌의 로맨티시스트 '사랑과 전쟁' 이야기
한 신사가 머리 위로 하트를 만들어 보이며 숙녀에게 낭만적인 고백을 합니다. 숙녀를 졸졸 따라다니며 하트를 계속 날리는 모습이 집요해 보이는 것을 넘어 자칫 스토커로 여겨질 정도입니다. 사랑 고백을 받은 숙녀는 어두컴컴한 터널 속으로 재빨리 숨어버립니다. 쑥스러운지, 부담스러운지 알 수 없는 숙녀의 행동.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숙녀는 건강미 넘치는 커다란 집게발과 구애의 춤 솜씨를 보고 짝꿍을 맞이한다고 합니다. 시각이 아주 예민한 그녀는 상대가 마음에 들면 굴속으로 함께 들어가 사랑을 속삭이지만,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도망치기도 합니다. 숙녀의 취향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선택은 매우 뚜렷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순정파'인 줄 알았던 신사는 바로 뒤돌아 다른 숙녀에게 또 사랑의 하트를 날립니다. 줏대도 없이 말이죠. 신사는 줏대만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 영역이라며 동성 친구와 종종 몸싸움을 벌이기도 합니다.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랑과 전쟁의 현장입니다.
'갯벌의 로맨티시스트'들을 만나기 위해 달려간 첫 목적지는 경기 안산시 대부도였는데요. 정보력 부족과 장비 준비 실수로 사랑의 현장을 많이 목격하지 못한 채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만 했습니다. 며칠 뒤 목격자들의 제보에 무려 15㎏에 달하는 촬영 장비를 바리바리 싸 들고 서울에서 차로 서너 시간 거리인 전북 고창군으로 달려갔습니다. '먹고 살기 참 쉽지 않네요, 잉.' # 수컷 칠게는 양쪽 집게발을 모두 머리 위로 올려 하트모양을 만듭니다. 사람들이 머리 위로 두 팔을 동그랗게 모아 하트 모양을 만들어 "사랑해"하고 표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암컷은 이를 보고 맘에 들면 짝짓기를 하고, 싫으면 거부합니다.
# 농게류 수컷은 한쪽 집게발이 비대칭적으로 큽니다. 암컷은 두 발 모두 작은 대칭형이고요. 짝짓기 철이 되면 농게류 수컷들은 ‘나 좀 봐줘’ 하는 것처럼 큰 집게발을 위아래로 흔들며 매력을 발산합니다. 수컷에게 한쪽에만 달린 커다란 집게발은 영역 싸움을 하는 데도 사용합니다. 서로의 집게발을 공격해 자를 듯 위협합니다. 농게류 중 빨간 집게발을 갖고 있어 매우 눈에 잘 띄는 녀석은 그냥 ‘농게’, 집게발이 흰색인 녀석은 ‘흰발농게’라고 부르는데요. 큰 집게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는 농게류 수컷의 모습이 마치 현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것처럼 보여 영문 이름은 현악기 연주자를 뜻하는 ‘피들러 크랩(Fiddler Crab)’입니다. 흰발농게는 흰색을 '우윳빛'으로 표현해 ‘밀키(Milky) 피들러 크랩’이고요. 흰발농게는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2급 해양생물입니다. 우리 갯벌의 대표 서식 종인데 최근 서식지인 갯벌이 매립 등으로 줄어들며 개체가 급감해 해양수산부가 지난해 9월28일 보호대상해양생물로 지정했습니다.
대부도까지 포함하면 촬영은 모두 사흘에 걸쳐 진행됐습니다. 사흘 동안 게들과 함께 갯벌에서 뒹굴고 있는데 선배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간장은 가져갔니?” 무슨 말인가 물었더니 싱싱할 때 바로 그 자리에서 게를 간장에 푹 담그라는 얘기였습니다.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에서 진흙과 사투를 벌이는 후배에게 집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어린 두 아들을 위한 '무공해 간장게장' 선물을 권한 것이죠. 한편으로는 고마웠지만, 한편으론 이런 '잔인한 선배 같으니라고'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얘들과 친구가 됐다는 혼자만의 착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얘들은 여전히 제가 숨만 크게 쉬어도 굴속으로 죄다 숨어버리는데 말이죠.
저는 아무래도 앞으로 게를 먹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풀만으로는 절대 밥을 먹을 수 없는 육식 예찬론자이기 때문에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입니다) *람사르고창갯벌센터에서 갯벌 생태 교육을 담당하고 계시는 전북 고창군 심원면 만돌리 김진근 이장님께서 자문해주셨습니다. <조수정의 寫讌은 사진 '사(寫)', 이야기 '연(讌)', '사진기자 조수정이 사진으로 풀어놓는 말랑말랑한 세상 이야기'입니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