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탄핵시계에 따라 달라지는 美 사법부 운명
대법원은 유·무죄에 대한 판단 없이 국정원이 트위터에 올린 글들의 증거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며 사실관계 추가 확정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법조계 안팎에선 “숲은 보지 않고 나무만 보고 면죄부를 제공했다”는 비난이 거세게 일었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등 이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검사들이 공소유지팀에서 배제되고, 한직으로 밀려난 상황을 대법원이 모르지 않았으니 "의도적인 파기환송"이라는 비난이 나올 법도 했다. 상고법원 설립을 위해 대법원이 청와대나 새누리당과 원 전 원장 사건을 놓고 거래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대법원은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지만, 당시 대법원 내부에서도 말들이 많았다. 한 대법관은 “밖에서는 파기환송한 것 자체 또는 전원합의체가 만장일치로 파기환송한 것을 두고 말들이 많은데 나는 그것보다는 정작 이 사건을 그렇게 빨리 결론을 냈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었다. 그러면서 “좀 더 신중하게 시간을 두고 판단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내가 주심 대법관이 아니라서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원 전 원장은 2015년 2월12일 대법원에 상고장을 제출했다. 이어 대법원은 같은 달 16일 대법원3부에 이 사건을 배당했고, 4월10일 주심을 민일영 전 대법관으로 정했다. 5월21일 대법관 출신인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선임계와 상고이유서를 제출했고,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7월16일 판기환송 했다. 5개월 만에 사건 처리가 일사천리로 진행된 셈이다. 법조계 한 인사는 “당시 확실히 서두른 감이 있었다”면서 “일선 판사들 사이에서도 그런 상황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다. 대법원이 정치적 외풍을 타고 있다는 생각을 그때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현재 진행중인 사법파동의 전조현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사법파동의 뿌리는 원 전 원장 사건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들이나 각종 정책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대법원이나 법원행정처가 시류에 영합했다는 일선 판사들의 깊은 불신이 자리잡고 있다”면서 “언제 터져도 터졌을 문제인데, 시기적으로 정권 교체기와 맞물리면서 일파만파로 커졌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런 상황이 사람이 바뀐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느냐에 대해선 회의적”이라며 “이용훈 전 대법원장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정권 교체기에 법원은 외풍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보수와 진보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만 바뀔 뿐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됐고,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다. 우리 뿐 아니라 세계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정권 교체기에 사법부를 둘러싼 보수와 진보의 힘겨루기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든 있었다. 후진국은 말할 것도 없으며,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지금 미국은 그야말로 매우 절망적인 상황이다. 기업가 출신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권력 사유화는 취임 6개월 만에 극에 달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딸과 사위가 백악관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고, 트럼프 대통령은 기업이 회장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듯이 국가도 그 같이 운영하고 있다. 자신의 말이 곧 법이라는 식이다. 행정명령을 남발하거나, 자신에게 비판적인 언론들을 터부시 하는 등 그의 독단과 독선은 끝없는 질주를 계속 하고 있다. 이런 트럼프 대통령에게 지금보다 더 한 날개를 달아주는 게 어쩌면 미 연방대법원이 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닐 고서치 대법관을 지명하면서 이 작업은 이미 시작됐다. 원래 9인의 대법관으로 구성된 연방대법원은 지난해 2월 극보수 성향의 앤터닌 스캘리아 전 연방대법관이 사망한 후 1년 넘게 8인 체제로 운영됐다. 정치 양극화 심화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지명한 온건 중도 성향 메릭 갈랜드 워싱턴 D.C 연방항소법원장을 공화당이 장장 10개월간 반대했던 탓이다. 그 덕분에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곧바로 고서치 대법관을 지명하는 행운을 얻었다. 미국에서 새 대통령 취임 당시 연방대법원에 공석이 있었던 것은 지난 1881년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 때가 마지막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선택은 탁월했다. 고서치 대법관은 지난 4월 미 상원에서 인준안이 통과된 후 3개월도 안되는 동안 연방대법원 내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가장 직설적인 대법관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반(反) 이민 행정명령, 총기권리, 정치자금, 정교분리 등 이념적 대립이 분명한 사건들에서 가장 강경한 목소리를 냈다. 특히 연방대법원이 반이민행정명령 가처분 소송을 일부 받아들이는 결정을 했을 때도 고서치 대법관은 클래런스 토머스,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과 함께 의견서에서 다른 동료 대법관들을 나무랐다. 반 이민행정명령의 법적 효력을 전부 인정해야지, 왜 일부만 인정하느냐는 것이었다. 지난 4월 고서치 대법관에 대해 “만나보니 합리적이더라”며 인준에 동의했던 민주당 상원의원 3명이 제 발등을 찍고 싶을 정도로 그는 뼈 속까지 보수적 가치에 충실한 사람인 것이다. 그의 활약은 앞으로 더욱 두드러질 것으로 예상된다. 오는 10월 연방대법원은 새 회기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 행정명령 본안사건을 다루게 된다. 반이민 행정명령에서 이슬람 국가 출신들의 미 입국을 금지하는 것이 종교적 차별에 해당하느냐는 이 사건 본질을 다루게 되는 것이다. 또 공화당에 유리하도록 되어 있는 선거구 획정 사건(게리멘더링)과 동성애자의 권리와 종교적 자유가 서로 충돌하는 웨딩케이크 사건 등에 대해서도 판결이 예정돼 있다. 고서치 대법관이 헌법을 곧이곧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오리지널리스트'(originalist)이자, 법조문 역시 쓰인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는 '원문주의자'(textualist)인 것을 감안하면 그가 4명의 진보적 대법관들 편에 설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마저 퇴임하면 연방대법원 판결은 보수일색으로 치닫을 수 밖에 없다. 케네디 대법관은 중도 보수 성향으로 이념적 논쟁이 벌어진 사건에서 항상 캐스팅보트 역할을 해왔다. 이 때문에 미 민주당과 진보진영에게 케네디 대법관은 매우 소중한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최근 고서치 대법관의 강경 보수 성향이 논란이 되자, 진보진영 내에선 30년 전에 있었던 로버트 보크 대법관 후보자 인준 반대 사태가 갑자기 논쟁거리로 등장했다. 당시 보크 인준을 민주당이 반대하지 않았다면 지금 고서치 대법관 때문에 골치 아픈 일도 없었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1987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은 보크를 대법관 후보에 지명했다. 보크는 반 인종차별법 등 1960년대 인권운동의 성과를 공공연하게 부정하고 여성 낙태에도 반대한 극우 인사였다.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 해임을 지시하자 법무부 장·차관이 이에 반발해 잇따라 사임했지만, 보크는 법무부 송무실장으로 있으면서 콕스의 해임을 집행했다. 보크는 여당인 공화당 의원 6명의 이탈로 찬성 48대 반대 52로 미 상원에서 인준이 부결됐다. 뉴욕대 로스쿨 켄지 요시노 교수는 “진보진영이 보크 인준 반대를 후회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면서 “(1차 지명자인) 보크를 부결시켰기 때문에 (2차 지명자인) 더글러스 긴즈버그도 저지할 수 있었고,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케네디 대법관을 만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는 지금까지 진행된 모든 사건들에서 케네디 대법관의 화려한 활약을 보아왔고, 그것은 우리가 보크를 반대하지 않았다면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서 “케네디 대법관이 퇴임할 때까지 동성결혼, 낙태, 그리고 다른 문제들에 있어서 그의 긍정적인 활동을 보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제는 최근 케네디 대법관 퇴임설이 불거졌다는 것이다. 그는 퇴임설이 제기되자 일단 올해 말까지는 퇴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이미 80세의 고령인 그에게 퇴임은 그리 멀지 않은 이야기인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트럼프 대통령이 케네디 대법관 퇴임 전 탄핵되지 않는 이상 그의 후임에 고서치 대법관 못지 않은 강경 보수가 지명되는 것이 머지 않은 미래에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 연방대법원 구성도 결국 트럼프 대통령의 탄핵 여부 및 시기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이다. 탄핵 시기가 늦어지거나, 탄핵되지 않을 경우 트럼프 대통령은 미 사법부를 전체를 이념적으로 보수화하는 전례 없는 기회를 맞이할 수도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공화당은 지난 2015년 상원에서 다수당을 확보한 뒤 한가지 전략을 지속적으로 강행했다. 버락 오마바 전 대통령이 하급법원 판사 지명을 최대한 늦추도록 한 것이다. 그 결과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월 취임했을 당시 하급법원에는 107석이 비어 있었다. 전체 890석 중 12%가 공석이었던 것이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취임 초기 54석,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84석이 공석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비어있는 자리가 상당히 많은 셈이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보다 4석이 많은 111석이 비어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 취임 6개월간 당초 107석이던 공석은 136석으로 늘어났다. 미 법조계에선 공석이 앞으로 더 늘어날 수도 있는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당시 보수적 성향의 헤리티지 재단 등에 연방대법관 후보를 추천해줄 것을 요청했고, 결국 21명의 후보자 명단을 받았다. 고서치 대법관도 그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현재 하급법원 판사 지명에도 같은 방법을 동원하고 있으며, 워싱턴 D.C연방항소법원 판사였던 고서치 대법관 후임에 앨리슨 에이드를 지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에이드를 포함해 지금까지 10여명의 보수 성향 인사들을 하급법원 판사로 지명했고, 보수진영에서는 이에 반색하는 분위기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사법부가 오히려 트럼프 행정부의 극단적인 정책들을 시행하기 위한 보호막이 될 가능성이 높다. 워싱턴 법조연합측 낸 애런 대표는 "모든 상황이 우려스럽다"면서 "사법부는 트럼프 행정부의 극단적 정책들을 마지막으로 체크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 곳이 보수일색으로 된다면 오히려 그 정책들에 힘을 실어주는 판단들이 나올 것이고 그 피해는 국민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말처럼 미 사법부의 운명은 현재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명운에 따라 상당히 달라지게 되어 있다. 어쩌면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의 수사 결과가 나오고, 연방대법원이 새 회기를 시작하는 오는 10월 정도에는 미국판 사법파동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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