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정의 寫讌] '다시 세운' 상가를 지키는 초로의 장인들
#1. 오래된 턴테이블에서 유명 클래식 기타리스트 알리리오 디아즈(Alirio Díaz)의 LP레코드판이 돌아간다. 흘러나오는 음악이 낡은 것들과 어우러진다. 공간을 채운 것들은 모두 오래된 것들이다. 40년을 사용했지만 녹슬지 않은 ‘장수’ 공구들, 바퀴의자를 개조한 작업판. 이 방에는 손때 묻지 않은 것이 없다. 세월이 녹아있는 이곳은 8층 류재용 씨의 작업실이다. 컴퓨터 화면에는 MS도스 6.2버전으로 작업하던 전자회로의 설계도가 펼쳐져 있다. 류 씨는 1995년 구입한 PCAD를 아직 사용하고 있다. “옛날 것이 손에 익어서, 편하고 좋아서 바꾸지 않아요. 이 방에 있는 것들, 다 30년에서 50년쯤 된 것들이에요. 오디오를 정확하게 세팅하고 수정하는데 필요한 이 오디오 테스터는 30년 전 당시 돈으로 150만원 주고 구입했어요. 지금은 생산하지 않아서 구할 수 없어요. 지금 나오는 테스터는 억대의 가격이라 감히 개인이 살 수 없어요. 또 하나는 30년 전 1000만원이 넘었던 장비예요. 이 테스터들로 내가 만든 기계를 하나하나 테스트한 목록이에요.”
“귀로 듣고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로 정확히 음질을 측정해야 해요. 이 과정을 철저히 해야 만족스러운 소리를 듣습니다.” 류 씨는 30대 초반 세운상가에 들어왔다. 세운상가가 매우 인기 있었던 때다. 당시는 대기해서 들어와야만 했다.
“젊을 때 꿈이 좋은 진공관 앰프 하나 갖는 것이었어요. 저는 뭐든 구입해서 만져봐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그래서 최근에 40~50년 된 진공관 앰프를 하나 입수했어요. 단종된 인티앰프(Integrated Amplifier) ‘피셔202-B’예요. 고장 난 걸 정상으로 만들어 내가 만든 것과 음질을 비교 해봤어요. 내가 만든 것이 더 낫더라고요. 내가 잘 만들어서는 아니고요(웃음). 진공관이 나온 지 100년입니다. 50년 동안 재료와 기술이 많이 발전했어요. 그래서 지금 나오는 재료를 잘 이용해 만들면 옛것보다 성능이 더 좋습니다.” 류 씨는 젊은 날을 회상한다. 늦은 시간에도 문 닫을 필요 없는 세운상가에서 밤낮없이 일하던 시간이 좋았다고 말한다. 좋아하는 일인 오디오를 만드는 것이 지금도 즐겁다. #2. “저기 한번 가보슈. 저 집 양반 엄청난 사람이야. 못 고치는게 없어”
반짝반짝 윤이 나는 커다란 전열기구들이 상점 입구에 늘어서 있다. 무슨 상점인가 궁금해 들여다보니 업소용 전기난로를 고치고 있는 이평섭 씨가 보인다. 그는 전열기구를 설계하고, 디자인까지 한다. 고치는 제품은 이 씨가 만들었는데 14년 만에 고장 나 수리를 맡겼다고 했다. 이 씨는 이 제품을 열심히 고치고 닦았다. 그을음을 닦고 나니 새것처럼 반질반질 윤이 난다. 이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일본인 대표가 운영하는 회사에 들어갔다고 했다. 대표는 이 씨의 공구를 다루는 손을 보고 기술을 좀 가르쳐 줘야겠다며 일본 오사카로 이 씨를 불러들였다. 한국에 수출한 제품 수리를 맡기기 위해서였다. 이 씨는 2년 정도 오사카에서 공업용 버너 만드는 기술을 배웠고 1987년 귀국해 1990년 4월 1일 세운상가에 가게를 얻었다. 개발한 제품에 전기안전용품 인증도 받았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리는 듯 했다. 하지만 이 씨에게 시련이 없었던 건 아니다. “좋은 제품을 만들려다보니 원가가 높아져 잘 팔리지 않았어요. 세운상가에 입주하기까지 1억 원 정도가 들었는데 또 한 달 유지비만 천만 원이 또 들어가니 4~5년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이 씨는 일본에서 기술을 배워온 이후 모르는 것들을 물어볼 곳이 없어 어려움이 많았다고 말한다. 배우기 위해 많이 돌아다녔다. 그리고 회로와 컨트롤시스템을 개발하는데 많이 투자했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실전에서 배웠다. 해를 거듭할수록 노하우가 쌓였다. 세운상가 입주 30년을 바라보고 있는 이 씨는 이날도 더 견고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고치고 만드는 중이다. <조수정의 사연(寫讌)은 사진 '사(寫)', 이야기 '연(讌)', '사진기자 조수정이 사진으로 풀어놓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