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의 더블데이트] '신스틸러' 정재은·이봉련 '발렌타인 데이'
이봉련은 올해 영화 '옥자'(감독 봉준호)에서 안내 데스크 직원, 영화 '택시운전사'(감독 장훈)에서 만삭의 임신부로 등장해 신스틸러임을 증명했다. 봉준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최근 가장 주목하고 있는 배우로 이봉련을 지목하기도 했다. 대세인 정재은과 이봉련이 한 연극에서 만났다. 예술의전당(사장 고학찬)이 2018년 1월14일까지 자유소극장 무대에 올리는 연극 '발렌타인 데이'(연출 김종원)다. 두 사람이 같은 연극에 출연하는 건 지난해 연극 '피카소 훔치기'에 이어 두 번째이자 1년 만이다. '발렌타인 데이'는 색다른 작품이라 더욱 관심을 끈다. 러시아 황금마스크 상을 수상한 작가 이반 븨릐파예프가 2009년 발표한 대표작이다. 이번이 한국 초연이다. 한 집에서 생활하는 두 여인이 동시에 사랑했던 과거의 한 남자에 관해 풀어내는 이야기다. 동시대 러시아 극작가의 작품이 큰 시간 차이 없이 국내에서 공연된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무엇보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꿈속을 넘나든다. 이로써 시적이고 입체적인, 연극적 미장센이 부각된다. 정재은은 '푸르른 날에' '그와 그녀의 목요일', 이봉련은 '만주전선' '청춘예찬' '1945' 등 지금껏 출연한 수작 연극들 속 캐릭터를 넘어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극 중 인물들의 나이가 18세부터 시작되는 이 작품에서 60세가 된 발렌티나와 까쨔는 옆방에서 같이 살고 있다. 갖은 일들을 겪고 함께 의지하며 사는 두 인물처럼 험난한 연극계에서 존재감을 드러내 온 두 사람 역시 마침내 만나 선후배 애정을 나누고 있다. 한국 연극계에서 두 여성 중심인물이 극을 끌어가는 경우는 드문 일이다. 최근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정재은은 이봉련의 원래부터 팬이었다고 했다. 2011년 재일교포들의 지난한 삶을 다룬 연극 '백년, 바람의 동료들'을 보고 '저 후배는 누구냐'라고 묻고 다녔다 했다. '발렌타인 데이' 출연 제의를 먼저 받은 정재은이 이봉련의 출연을 적극적으로 제의했다는 후문이다. 정재은은 "봉련이가 우리 창작극뿐만 아니라 러시아 정서의 작품에도 너무 잘 어울릴 거 같다고 생각했다"면서 "역시 같이 만나 해보니 너무 잘 맞다. 이봉련이라는 배우는 정말 폭이 큰 배우"라고 치켜세웠다. ,
두 배우가 '아름다운 희곡'이라고 극찬한 '발렌타인 데이'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그리움과 기억의 이야기다. 정재은은 "한 사람을 너무 그리워하는 이야기가 자칫 관객을 힘들게 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극 흐름을 따라가니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겠다 싶어지더라"고 말했다. "사람마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기억들이 있다. 발렌티나에게 그런 기억은 사랑이다." 정재은은 발렌티나를 "일생을 기억 속에서만 사는 여자"라고 해석했다. 원칙적으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한 까쨔와 함께 살 수 없는 여자지만, 까쨔와 인생을 같이하면서 발렌틴을 기억할 수 있어 까쨔에게 많이 의지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발렌티나와 까쨔는 애증의 관계다. 서로 미워하지만, 의지한다. 다르지만, 같은 면도 있다. 그래서 서로의 생각에 공통분모가 있고, 공감대가 있다"고 봤다. "외로움을 끝까지 이겨내기 위해 누군가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 발렌티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까쨔다."
"까쨔는 어떤 사람을 정말 한 없이 혼자 평생 사랑하는 역할이다. 사랑을 받지 못하면서도 그걸 지켜나가는 역이다. 엄청난 사랑을 하는 것 같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이기도 하다. 가깝게는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을 듯하다." 정재은은 이번 '발렌타인 데이'를 '선물 같은 작품'이라고 했다. "진짜 오랜만에 내 나이에 맞는, 내가 할 수 있는 역"이라는 것이다. "어느덧 중년이 됐는데 이 나잇대 여배우가 할 수 있는 희곡이 많지 않다. 몇 년 동안 이런 종류의 희곡에 목이 말랐는데, 선물처럼 다가왔다"고 웃었다. 비슷한 또래 배우 우현주, 정수영 등과 함께 결성한 극단 맨씨어터 소속이기도 한 정재은은 30대에는 매일 매일이 불안했는데 40대가 되면서 연극 작업에 재미와 희열을 더 느끼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할 수 있는 역할이 점차 줄어들 수 있는데 아직도 원하는 것을 하며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는 마음이다.
최민식, 설경구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대거 소속된 씨제스엔터테인먼트와 최근 전속계약을 맺은 이봉련은 연기 칭찬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이봉련은 "처음에는 소심한 성격 때문에 그런 것들이 부담되고 걱정됐다"며 "격려, 응원, 칭찬인 줄 알면서도 덜컥 겁이 나고 그로 인해 공연에 집중할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정재은을 비롯한 여러 선배의 말을 듣고, 현재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칭찬과 격려에 대해 부끄러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응원의 메시지를 주실 때 좋은 기운과 에너지로 승화시키고 싶다"는 것이다. "혼자 있을 때는 스스로 모자란다고 자책만 했다. 여러분이 주신 칭찬과 응원을 통해 내 장점을 알아차리고 싶다. 연극은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변 분들 덕분에 든든해지고 나 역시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다. 연극을 하는 이유다. '발렌타인 데이' 역시 마찬가지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