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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언의 책과 사람들]날 위로한 '오빠는 풍각쟁이야'

등록 2021-12-04 06:00:00   최종수정 2021-12-04 14: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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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오빠는 풍각쟁이야 (사진=한상언 제공) 2021.11.2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대학원 석사과정을 다니던 중 취업을 하게 되었다. 내가 들어간 곳은 한 지역농협이었다. 영화학이라는 전공과는 크게 관련 없는 곳이었다.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어떻게든 꾸역꾸역 수업을 들어 학위과정은 마쳤으나 문제는 논문이었다. 논문을 쓴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결국 결혼 후 3개월 만에 직장을 그만두기로 했다. 언젠간 그만 둘 일이었으나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아내가 흔쾌히 동의해주어 큰 힘이 되었다.

가정을 꾸리자마자 회사를 그만둔다고 하니 부모님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회사에서도 입사 1년밖에 안 된 신입사원이 사표를 썼으니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조합장이 불러 몇 번이나 설득을 했다. 이상하게도 주변의 반대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회사를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은 보다 확고해졌다.

퇴사 후 학교 도서관 한 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논문을 썼다. 처음 생각했던 주제는 일제강점기 영화배우이자 가수로도 유명했으며 해방 후에는 영화감독으로 활동했던 강홍식이라는 인물이었다. 지도 교수인 정태수 선생은 그간 직장 생활하느냐 공부가 부족했을 테니 한 학기 더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논문을 써보라고 했다. 급하게 논문을 완성해야 한다는 강박을 떨치니 여유가 찾아왔다. 그 사이 임신한 아내의 입덧은 날로 심해졌고 배는 점점 불러왔다.

여름방학이 되어 만삭인 아내와 처가인 포항으로 내려갔다. 그때까지 내가 퇴사했는지 모르고 있던 처가 어르신들에게는 출근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홀로 서울로 올라갔다. 4시간이 넘는 장거리 여행에서 무료한 시간을 때우려 버스에 타기 전 포항공대 구내서점에서 책을 한 권 샀다. 그 책이 장유정의 '오빠는 풍각쟁이야'(민음인, 2006.)였다.

이 책은 우리 가요에 관한 최초의 박사 학위 논문이자 본격적인 연구서였다. 그 무렵 신문과 방송을 통해 여러 차례 소개될 정도로 큰 화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그 세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흥미위주의 이야기로 가득 찬 가벼운 책도 아니고, 학술적이고 전문적인 용어와 낯선 개념들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는 자기 방어적인 책도 아닌, 일제강점기 우리 가요사를 학술적으로 엮어낸 흥미로운 책이었다.

책을 다 읽었을 때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을 보며 "내가 이런 좋은 책을 쓸 수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집에 와 책꽂이에 꽂아 둔 이 책을 보며 내가 박사논문을 쓸 무렵에는 이와 비슷한 수준 높은 책을 쓰고 있겠지 하는 위로 같은 것을 받기도 했다.

이 책과는 별개로 나의 석사논문의 주제는 '해방기 영화운동'으로 바뀌었다. 내가 쓰고자 했던 강홍식에 관한 글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 '강홍식 傳'(한상언영화연구소, 2019)이라는 책으로 완성되었다. 그 책이 나왔을 때는 오래된 숙제를 마무리 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 내가 운영하고 있는 연구소에서는 '1980년대 민족영화운동에 관한 자료집 발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일을 돕기 위해 중앙대학교 영화학 전공 석사과정에 있는 김명우 학생이 일주일에 두 번씩 연구소로 찾아오고 있다. 석사논문을 어떻게 써야 할지 걱정이 많은 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가 석사논문 쓰던 때의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장유정의 '오빠는 풍각쟁이야'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이미 몇 권의 책을 발간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나는 그와 비슷한 좋은 책을 쓸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상언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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